늘어나다_윤석남 개인전
To Be Lengthened_Yun Suk-nam Solo Exhibition
2003.10.17.(Fri) ─ 2003.11.30.(Sun)

늘어나다_페미니즘의 새로운 길
윤석남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아티스트라 불려지길 원한다. 그렇다면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나라 페미니즘미술의 현황을 한번 짚어보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여성미술가라고 불린다는 것을 오히려 달갑지 않게 여기는 현실 속에서 윤석남이 페미니스트를 굳이 고집하는 것을 보며 우리 땅에서 여성미술이, 그리고 페미니즘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구, 특히 미국에서 페미니즘미술이 발생하게 된 문화적 사회적 배경이나 여건과 달리 한국의 여성미술은 상당히 다른 출발점을 가지는 때문인지 더러 오해로 빚어진 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미국에서는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벌어진 1960-70년대의 다양한 여성운동 중 하나의 방편으로서 여성미술이 전개된 반면, 우리 나라에서는 1980년대 초반, 지배층과 맞선 피지배계층의 항변에서 비롯된 민주화 운동과 함께 민중미술이 싹 텄고, 여성미술은 바로 그 민중미술의 하위개념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여성미술이 여성의 지위를 언급한다거나 미술의 변천과정으로서 존재했다기보다는 사회적 운동의 도구로 인식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미술이 여성성의 습득이라는 본질적 목적을 얻지 못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선입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여성운동가들의 모임이 실제 이상의 과격함을 지닌 여성들의 집단으로 알려짐으로써 그 진의가 왜곡되기도 했다. 여성미술이 모더니즘 이후에 따른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양상 중 하나로 읽힐 수 있었다면, 그리고 여성운동이 사회가 단계적으로 진보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면 이들에 대한 편견이 불식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또한 윤석남이 굳이 여성미술가가 아닌 페미니스트 아티스트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페미니즘’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의미가 불완전하게 전달되는 것에 기인할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조금 다른 예로, ‘modern’이 번역될 때 ‘모던’이 주는 의미와 ‘근대’가 주는 의미가 다른 것처럼 ‘페미니스트 아티스트’와 ‘여성미술가’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있을 거란 뜻이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이 여성주의에 비해 좀더 포용력 있고 포괄적인 의미가 있음을 의미한다. 윤석남은 어떠한 편파적 시각에 묶인 여성운동이 아니라 누구나 공감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로서의 여성운동, 그리고 여성미술을 실천하고자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전에 알던 모습과는 무척 다른 자세로 삶을 개척해 가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물론 나는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윤석남 이전의 윤석남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인생을 쌓아 가는 과정에 있어서 체험이나 절실한 계기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윤석남은 스스로의 생을 바꾸고 새로이 일으킨 사람이다.
윤석남의 학창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녀는 미술 이전에 오히려 문학을 지망하는 학생이었다. 어렸을 적 그녀의 집안은 물질적으로 크게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문필가였던 아버지의 영향 아래, 그녀는 그 시절로서는 드물게 책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말하자면 정신적인 부르주아의 삶을 영위했다 할 수 있겠다. 지금도 그녀의 작업에는 수필가의 글 솜씨로 보여지는 글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아버지로부터의 대물림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녀가 16세 되던 해, 이제까지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삶의 기둥은 어머니로 바뀐다. 갑작스레 닥친 어머니의 현실을 보며 깨닫게 된 윤석남의 여성주의적 시각은 후에 그녀 작업의 주요 모티브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맞이한 결혼은 평범하고 무료한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미심쩍고 의미를 부인하기에는 잃는 것이 많은 그런 생이라 할까. 30대 후반 무렵, 삶에 희열도 없고 희망도 없다고 느낀 순간부터 그녀는 붓글씨에 빠져들었고, 이후 5년 동안 그녀의 표현대로 ‘죽도록’ 글씨에 매달린다. 비로소 그녀는 살아있다는 안도감을 깨닫게 되는데, 이때 단련된 붓 터치는 그녀의 글 솜씨와 더불어 윤석남 작업세계의 큰 원동력이 된다.
지금은 윤석남이 우리 나라 미술계의 주요작가로 헤아려지나, 그녀가 미술가로 데뷔한 시기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려, 그녀가 43세에 이르러서야 첫 개인전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에는 현재의 조각설치작업과는 달리 평면작품을 보였다. 윤석남의 그림은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를 대신해 가정을 책임져온 그녀의 어머니 또는 이 땅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었다. 그 즈음은 민중미술이 표면에 떠오르기 직전으로, 미술계가 추상 일변도로 흐르고 있는 상태에서 어머니 또는 여성에 대한 감정을 표현한 윤석남의 작업은 상당히 신선하게 비쳤으리라 여겨진다. 윤석남이 당시 민중미술이나 여성미술에 대한 대외적 사명감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했던 건 아닌 듯하다. 다만 그녀가 스스로 존재하는 주체가 되고자 뒤늦게 선택했던 미술이라는 것이 필연성을 띠고 있었던 만큼이나 작업에도 여성의 필연성을 담고 있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1985년, 윤석남은 김인순, 김진숙과 함께 ‘시월모임’의 첫 전시를 가지면서 여성미술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다. 이들의 행위는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나 한편으로는, 일련의 시대적 요청에 윤석남은 큰 부담을 가진다. 1989년, 윤석남은 작업을 중단하고 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 그림, 그리고 여성의 삶에 대한 진정한 고민을 시작한다.
윤석남은 페미니즘 미술의 본원지인 미국에서 여성미술가들의 작업을 직접 접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작업이 한 단계 성숙해지는 계기를 맞는다. 당시 미국은 페미니즘미술의 역사가 20여 년에 이르면서 여성미술계의 세대변화를 겪고 있었고, 다양하고 새로운 형태의 시도들이 생겨났다. 즉, 남성주의적 제도에 대항하는 과거의 자세에서 진보하여, 매체의 전달력을 이용함으로써 대중적 이해를 이끌어내는 경향들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들 중 바바라 크루거의 진보적 전달방식은 윤석남의 작업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윤석남은 다양한 물체나 방식을 이용한 작업들을 눈여겨보며, 새로이 깨달은 여성주의적 의식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귀국 후 1993년 ‘어머니 눈’ 개인전에서는 빨래판, 폐목재 등 주변의 재료를 이용하여 조각한 어머니 상을 선보인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시월모임’ 시절 가부장제도의 부조리함을 고발하던 사회운동 성향에서 벗어나 작업의 관심사를 ‘나’라는 자아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전투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도 여성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유토피아 지향적인 작품세계를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윤석남은 남성 중심으로 시스템화 되어있는 세상에 물음표를 던지고 그녀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를 알림으로써 여성과 남성이 함께 존재하는 유토피아를 지향하고자 한다. 1997년의 개인전은 그녀의 존재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기회가 되었으며, 모든 이들의 뇌리에 각인된 999개의 조각상과 뾰족한 갈퀴의 핑크색 의자는 그녀 작업의 상징적 모티브로 알려지게 된다.
윤석남은 의자가 서구문화가 한국에 유입되면서 변하게 된 생활방식을 대표하는 물체라 정의하며, 서구와 한국의 경계선에 위치한 오브제이자 아울러 여성성을 상징하고 있다고 말한다. 윤석남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서구에서 의자는 시대의식의 변모를 읽을 수 있는 상징적 가치를 지닌 물건이다. 의자 디자인의 변천은 단순히 가구디자인의 역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양식의 총체적 모습을 읽어낼 수 있는 사회문화적 코드이기도 하다. 윤석남의 의자가 한동안 우리 문화가 선호했던 꽃 문양이 조각된, 어쩌면 급진적 부(富)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르는 다소 천박한 디자인으로 조각된 것을 보면서 우리가 서구화되면서 얻은 것들과 잃은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의자를 바치고 있는 네다리의 갈퀴 같은 발톱은 무엇일까. 이는 작가가 의자를 여성으로 보고 있는 관점과 연관되는 것으로, 바로 위태위태하게 서있는 이 땅 여성들의 실체이자 이들의 심리를 뜻한다. 뾰족한 발톱 끝으로 서있는 의자는 한 사람, 한 사람 보듬어 안아주느라 스스로는 짓밟히고 허물어져 갈 것만 같다.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의자가 화려함의 극치인 핑크색 비단으로 씌워졌다는 것은 상징의 아이러니다.
최근 수원 근방의 작업실에서 만난 새로운 작업들은 예전의 작업 전반에서 보여진 핑크색이 옥색으로 그리고 더러는 자주색으로 대체되었음을 본다. 과거 윤석남이 그녀 자신의 불안과 좌절로 찼던 심리상태를 핑크라는 강렬하고 화려한 색으로 가리길 원했다면,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귀국 무렵의 도약에 이은 또 다른 도약이다. 이전의 조각작업에서는 어머니 그리고 이 땅의 여성에게 뭐라 확언할 수 없는 일종의 부채 같은 것이 있어 이를 보상해야겠다는, 왠지 불편한 감정이 드러나 보였으나 이제는 이러한 심리적 빚이 청산되어 보인다. ‘나’라는 개인에게로 돌려진 관심은 축소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을 확보하였으며 작품을 보는 이에게 안정과 평안을 안겨준다. 따라서 웅크렸던 여인상은 이제 가슴을 펴고 긴 팔을 내저으며 자신 있게 온 세상을 감싸 앉아줄 것만 같다. 여인의 긴 팔은 과장되어 보이기보다는 삶의 적극적인 의지를 상징한다. 작가의 체험과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깊어지며 갖는 희망은 젊을 때 갈망했던 희망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옥색은 평화이자 희망의 상징이다.
희망은 곧 희열이다. 윤석남에게 희열은 대지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띄어 있을 때 더욱 명료해진다. 윤석남은 예전의 어느 칼럼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누가 나에게 ‘예술가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상으로부터 20㎝ 정도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너무 높으면 자세히 볼 수 없고 현실 속에 파묻히면 좁게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대지 한 걸음 위의 그네타기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기계문명의 발달로 그네타기는 이미 잊혀진 놀이가 되고 말았지만, 아직도 놀이터나 초등학교의 운동장 한구석에 걸려있는 그네의 두 줄은 타고 싶고 나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네가 과거 우리의 여인네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해 주는 유일한 놀이기구였다는 사실에서 윤석남이 그네에 유달리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윤석남은 그네 위에서 모든 잡념을 흩날려버렸을 우리 어머니와 그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작업의 카타르시스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윤석남은 여성 인물상을 조각하는 아티스트이다. 하지만 그녀의 여인상은 인체의 곡선 또는 율동을 중시하거나, 추상형태의 조형미를 추구하느라 애쓰지 않는다. 또한 신체를 이용한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연출하려 하거나 신체를 텍스트화함으로써 어떤 거대담론을 제시하려 하지도 않는다. 작가는 인체미를 숭상하는 모더니즘적 시각도, 과장된 여성운동적 시각도 배척하고 있되 조각을 회화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작가 고유의 특성에 몰두한다. 그녀는 자연에서 얻은 나무의 재질과 특성을 고스란히 살려내고, 여기에 붓글씨로 다듬어진 먹선을 이용하여 여인의 얼굴을 그리고 옷을 입힌다. 그녀가 그려내는 여인의 얼굴은 억압받는 여성이 아니라 스스로를 거듭나게 하는 얼굴이다. 삶의 경험과 감정의 근원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이 작업들은 작가 윤석남의 가치관이자 세계관이며, 우리에게 주는 감동이자 번민의 작은 결실이기도 하다.
문득 소리 없는 외침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 들리지 않는 외침은 그 어떤 들리는 소리보다 울림이 커서 보는 이의 심상에 큰 메아리로 남는다. 힘들게 태어난 이 여인들이야말로 자신을 드러낼 듯 말 듯 하면서도 속내의 강한 의지를 담아내고 있는 우리의 어머니이자 윤석남 자신의 모습이다. 이제 우리는 페미니즘 또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을 바꾸어야 할 일이다. 페미니즘이란 새로운 모색임을 그네 위의 여인은 전하고 있다.
김태령 / 일민미술관 디렉터

참여작가
윤석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