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코리아 2000_A Link_한국체류 외국작가전
Made in Korea 2000_A Link_Artists Living in Korea
2000.02.22.(Tue) ─ 2000.03.30.(Thu)

에이링크는 1997년 10월 서울에서 앤드류 오웬과 필자와의 활발한 대화에서 출발했다. 예술에 대한 논의를 통해 서로 더 많은 대화의 필요성에 동감하고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를 마련했는데, 첫 모임에서는 여덟 명의 작가들이 모여 포럼을 결성하고 작품 작업과 시각예술을 통해 한국사회에 접근하는 구상들을 교환했다. 우리의 비공식 월례 모임은 작가의 작품에 대한 슬라이드, 비디오, 영화 등을 상영하고 한국 작가들과 학생들을 토론에 초청하고 나아가 한국에서 활동중인 작가들에 대한 지원과 상호교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비록 모임이 일시적이고 각자의 체류기간과 목적도 달랐지만 우리의 작품은 한국에 머무르는 도안 이곳의 문제들, 아시아적 경험들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술가인 동시에 교육자인 필자는 에이링크의 임무 중 하나가 새로운 시각적 요소를 창출하고 한국학생들과 해외 한국작가들과 교유하는데 있다고 느꼈다. 에이링크의 회원은 몇 달 안에 8개국 20명 이상으로 늘었으며 우리는 작품제작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들의 접근을 위한 전시회를 열기로 하였다. 일민미술관은 우리의 제안에 바로 관심을 보였고 한국과 다른 나라들 사이의 예술교류에 가교 역할을 맡고자 했다. 그러나, 1998년 10월 필자와 앤드류 오웬은 전시회 계획이 완성되기 전에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에이링크가 새로운 리더를 맞아 어려운 전환의 고비를 잘 넘길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모임에 활동적이고 헌신적으로 참여해 온 레이몬드 한에게 기수를 넘겼다. 일민미술관에서 외국 작가들의 전시회를 개최하고자 했던 우리의 소망은 레이몬드 한의 역량과 확고한 의지 그리고 일민미술관의 깊은 관심에 의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에이링크 회원들은 한국사회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아 왔으며 필자는 이번 ‘메이드 인 코리아 2000’전이 상호문화적 대화와 한국인의 심성과 사고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000년 2월
에이링크 공동창립자 Mary E. Roettger

왜 메이드 인 코리아 인가?
1950년 한국전쟁 이래 문화 예술의 발전은 주로 정치와 경제의 잣대로 정의되어 왔으며 전통문화는 관광 사업 진흥을 위해 이용되었다. 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80년대로 이어지는 민중미술은 정치적 실패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90년대의 예술(미술)은 1997년 IMF 사태와 경제 위기 같은 경제와 무역의 문제에 집중하였다.
뒤이은 IMF시대를 맞아 무조건 국산품만이 좋고 외제는 배척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해외 여행조차 반대 캠페인에 밀려 억제되었다. 경제회복을 위해 비공식적으로 “한국 대 외국”의 사고가 이용되었다. 이러한 사고는 곧 금 모으기 운동으로 이어져 한국 국민들은 외환보유고 확보를 위해 금을 기증했다. 이러한 감정은 스포츠로도 번져나가 골프 선수 박세리를 역경을 이겨낸 국가적 상징으로 추켜세우게 된다. 1998년 월드컵 본선에서 국가 대표팀이 중요한 승부에서 패하자 이들은 결국 경제위기의 희생양이 되었다. 한국인대 외국인이라는 대립적 주제는 20세기 한국 예술계의 역사에서도 반복된다. 1910년 구한말 한국화가들에 의해 서양식 회화 기법이 도입된 이래 한국화와 서양화 간에는 언제나 분명한 구분이 있어 왔다. 외래로 간주되는 것은 보다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것에 의해 배척되었다. 비록 1990년대 중반 베니스와 광주 비엔날레가 한국 예술의 세계화에 기여했지만 한국적인 것에 대한 정의에는 여전히 혼란이 있다.
‘Made in Korea 2000’전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계기로 삼는다. 서기 2천년(단기 4698년)에 한국은 세계 경제와 문화에서의 역할을 재검토하는 전환기를 맞고 있다. 에이링크는 미술을 통해 지속적인 세계화에 대한 대화를 좀 다른 측면에서 제기하고자 한다. 해외에서의 세계화가 아닌 내부적인(국내에서의) 세계화를 말하는 것이다.
‘Made in Korea 2000’은 한국 체류를 선택하고 국내서 작업 중인 다수의 외국 작가들이 여는 첫 공식 전시회이다. 작품은 회화와 조각, 사진, 영상 등 모든 매체를 망라한다. 전시 작품은 남한과 북한 모두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작가 선정의 주요 기준은 작품과 작품제작과정에 얼마나 한국문화의 영향을 받았는가 이다. 이러한 영향을 통해 우리는 관람객들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작품이 한국에 거주하는 작가에 의해 한국에서 제작되었다면 한국작품이라 할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한국적인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본 전시회의 일부 작가들은 서울에 대한 관찰에 기반한 작품제작에 집중하였다. 우루스 오델의 ‘서울의 지니’와 ‘명동’ 사진 설치작업은 서울을 개인적 대도시라는 시각에서 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서울을 하나의 성으로 묘사하여 보다 내밀하고 숨겨져 있는 한국에 접근하려는 작가의 모색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앤드류 오웬의 ‘어디에서-서울’은 사진기를 지닌 관광객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사진기나 관광객은 모두 사라지고 스티커 사진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관광객과 방랑의 결과물인 스냅사진들은 한국의 십대 시장을 겨냥한 사업의 묘사로 대체되었다.
데이빗 켈로그는 또 다른 관점에서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기법을 훈련 받는 등 중국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 중국과 한국의 풍경을 그리는데 신화의 서술적 필치는 동원하여 이들 사이에서 개인들의 삶에 미치는 자본주의의 영향이라는 보다 거대한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프랑스 화가 쿠르베가 노동자를 시대의 영웅으로 극화한 것에 비해 그는 관객에게 사회 불평등의 상황을 미료하고 부드럽게 전달하고 있다.
그 밖의 다른 작가들은 문화의 개인적 측면에 중점을 두고 작품에 이를 반영하고 있다. 유타 오덴발더의 ‘보자기 컬렉션’은 전통에서 현대로의 이행에 대한 은유이다. 그녀의 ‘산을 상상하다’ 연작 역시도 한국적 상징을 의식과 무의식간의 균형을 잡는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조지 맥컬리의 도자 작품들은 초기 분청의 영향을 취하고 있다. 그에게 이러한 영향은 도자제작 과정이나 가마작업에 있어 똑같이 중요하다. 다른 한편으로 에드워드 도헤티의 경우 자신의 조각들을 한국 체류 동안 추억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있다.
스테파니 르 기에르는 접근에 있어 차별적이다. 그림의 주제들은 이미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결정되었지만 이후 한국에서 받은 영향들을 통해 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결과적으로 작품은 다수의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녀의 작품 중 일부는 마치 글쓰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체의 율동과 손의 율동간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제랄드 류이스의 그림들은 모양과 형태, 신체들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소망을 답고 잇다. 그는 먹그림에서 돼지의 역할을 맡아 주체와 환경 사이의 조화를 수립하고자 시도한다. 연필화에서는 다수의 불규칙하고 전기적 형태들 간의 일치를 강조하고 이들 간의 상호 관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매리 로튀거의 작품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형태들을 모델로 한다. 그녀의 조각들은 식물의 씨나 꼬투리의 유기적 구조나 솔방울의 균형적 형태에 영감을 두고 있다. 근작인 오징어 연작에서는 한국에서 가르치던 학생으로부터 받은 오징어를 청동주물로 제작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젠덱 역시 자연적인 것에 대해 작업하고 있다. 그녀의 그림에서 피부는 작품의 담론이다. 피부는 스트레스와 피로 그리고 다른 인내에 대한 시험의 기록이다. 그녀의 회화작품들은 피부에 의해 외국인으로 규정되는 작가의 역할을 나타냄과 동시에 사회 안의 한 개인이 되고자 하는 투쟁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투쟁은 그녀와 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투쟁은 베린다 윌슨의 작품 주제이기도 하다. ‘비무장지대는 새집을 사랑한다’에서 작가는 한국 비단으로 조각을 만들어 격동의 한국역사에 대한 찬가를 바치고 있다. 천이 지니는 상징성은 비단으로 ‘러브 베스트’ 연작을 작업한 멜라니 반덴 호벤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다만, 그녀의 경우 연인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검토하고 있다. 바디랭귀지는 대단히 신중하지만 오히려 신체의 가면이랄 수 있는 의상에 의해 구체화되고 확연해진다.
한 사회나 문화를 떠난 후에 재통합되고자 하는 노력도 있다. 그러나 그 문화에 대한 기억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려운 일이다. 캐이트 허쉬서는 전화카드를 통해 이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해외로 입양된 그녀는 한국과 외국에서 동시에 받아들여지고 거부당하는 혼란을 퍼포먼스를 통해 보여준다.
한국에서 입양에 대한 문제 제기는 많았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 입양아를 한 인간이 아닌 상품의 관점에서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또 다른 한국계 입양아 출신인 미희 나찰리 르므완은 입양이라는 문제를 개인적이고 사적인 주제로 돌리고 있다. ‘미워 인생(추하고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녀는 한글과 한자를 가지고 작업하면서 내부자와 외부자, 관찰자의 끝없이 변화하는 위치들 간의 대비의 메타텍스트를 창조하고 있다.
필자는 특히 관찰자의 역할에 대해 좀 더 부연하고자 한다. 한미문제에 관심 있는 사진가로서 필자에게는 한국에 가서 한국인들의 일상에 대해 배우는 것이 중요했다. ‘굴절’은 성남시 분당의 한 초등학교 4학년 학급을 일년 동안 촬영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국의 부모들이 어떻게 자녀가 한국인이 되도록 가르치는가에 관심이 있었지만 점차 학급에 동화되면서 나 자신이 초등학교 학생으로 돌아가 한국에서 자라났다면 어떤 과거를 갖게 되었을지 짐작 할 수 있게 되었다.
관찰자로서 때로는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문화에 대해 객관적 태도를 취하기 어려웠다. 한국계 입양아나 필자와 같은 교포는 아마도 자신의 일부를 되찾는다는 점에서 한국자체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다른 작가들의 경우는 다르다. 호주 출신의 영화감독 솔룬 호이스의 경우 1994년과 1996년 평양 국제 필름 페스티벌에 초청받고 캠코더를 가져가 다양한 사람들 특히 예술계 인사들에 대한 인터뷰를 담아왔다. 그녀의 영화 평양일기는 관객들을 같은 입장에 놓는다. 관객들 모두 국적에 상관없이 이방인이 된다. 그리고 정치나 선전과 달리 평양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생각해왔던 것보다 실제로는 훨씬 친근한 동족임을 발견하고 마음을 열게 된다.
에이링크와 같은 단체가 한국에 존재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예술가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데 만도 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들의 다양한 작품 제작 방식까지 고려한다면 더욱 힘들 일이다. 예술가들을 통합하는데 복합적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단체와 인사들의 도움 없이는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본 전시회는 일 년 여 걸친 지속적인 노력과 계획의 결과이다. 먼저 해외 작가들이 참여하여 한국 미술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준 일민미술관에 감사드린다. 지속적인 격려와 도움으로 본 전시회를 실현시키도록 이끌어준 박찬경과 메리 로튀거에게도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린다.
또한 선정위원회의 이영철, 이수경, 브라이트 미어스만, 유타 오덴발더, 메리 헬렌 스팰 등은 작가선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전시회 기획과 미술사, 미술비평 등의 분야에서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보다 알찬 전시를 만들어 주었다.
재정적, 외교적 지원을 해준 독일, 스위스, 영국, 캐나다, 프랑스, 호주대사관과 직원들께도 감사드린다. 특히 지난 99년 성신여대에서의 첫 전시회에 가장 먼저 도움을 주신 벨기에 대사관 측과 르니에르 니예스킨 대사께 감사드린다. 끝으로 우리를 믿고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2000년 2월 서울
Raymond Hahn / A Link

참여작가
벨린다 윌슨, 솔룬 호아스, 미희 나탈리 레몬, 엘레자베스 젠덱, 앤드류 오웬, 멜라니 반덴 호벤, 제럴드 윈스턴 류이스, 스테파니 르 케이알, 유타 오덴발더, 우루스 오델, 에드워드 도헤티, 레이몬드 한, 케이트 허쉬서, 데이빗 켈로그, 조지 맥컬리, 메리 로튀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