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ㅌ_구자영 비디오,퍼포먼스전 / 메트로놈_안수진 비디오,키네틱 설치전
Bi-t_Ku Jayoung Video,Performance Show / Metronome_Ahn Soojin Video,Kinetic Installation
2004.12.12.(Sun) ─ 2005.01.16.(Sun)

비-ㅌ_구자영 비디오/퍼포먼스 전
우리는 볼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는 이미지일수도 있고 글자와 같은 기호일수도 있고, 눈앞에서 보고 있는 그림 같은 실체일 수도 있다. 하루가 다르게 들어서는 건물들, 쏟아지는 정보들, 스크린 위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들……매체의 발달은 이 모든 현상을 가속화시킨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대로 원본과 모사를 구별할 수 없고, 구별할 필요도 없는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과 그가 표상하는 것의 관계나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일단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잡게 된다. 실재의 세계가 존재하고 기호나 그림은 이를 제시한다. 매체는 이미지나 정보를 실어 나르고 이 가운데서 환영과 아우라가 태어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환영인가 실재인가. 우리는 실재하는 현상 속에서 실체, 환영, 정보, 감정을 매일 원하는 대로 골라내서 받아들이고 있는가? 꼭 그래야만 하는가?
90년대 말부터 뉴욕에서 비디오와 매체를 공부하고 그곳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구자영의 작업은 각기 다른 시간에 찍은 비디오를 한 장소에 투사하며 동시에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이다. 시간의 연속에서 단순한 행위들로 치밀하게 구성된 퍼포먼스를 보다 보면, 순간 어떤 것이 작가이고 어떤 것이 투사된 이미지인지 놓치게 된다. 그러다 진짜 사물이나 장소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이미지와 실재를 확인하게 되고, 결국 관객들은 기분 나쁘지 않은 혼란 가운데서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다. 구자영이 1999년에 뉴욕 퀸즈미술관에서 발표한 라는 작업은 작가가 문을 열고 창가리개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행위가 복잡하게 겹쳐진다. 작가가 문에서 또 다른 문으로 들락날락하는 이미지가 투사되면서 실제 행위와 동시에 보여진다. 집중력을 요구하는 이 퍼포먼스는 환상적이면서도 극적인 매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실체를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환영을 객체로 생각하던 관념이 애매해지면서 실체와 환영은 서로를 보완하는 대등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는 단순히 실체와 환영 가운데서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머무르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에게 관여하는 이미지를, 현실과 관여하는 이미지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미지의 투사가 일어나는 장소는 전에 그 이미지를 촬영한 바로 그 장소이다. 즉 실체와 환영이 틈을 주지 않도록 이미지들을 재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친절하게 실체와 투사된 이미지가 최대한의 환영을 일으키도록 배려한 후에, 작가 자신은 그 틈을 유유히 휘젓고 다닌다. 작가의 행위가 관객들이 환영 속으로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나 작가의 역할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스스로가 하나의 요소로, 비디오아트가 신체예술과의 오랜 끈을 끊을 수 없는 것처럼, 그 실험의 한가운데서 실체로 움직인다. 작가가 바로 실체이자, 환영의 원본으로서, 투사된 이미지와 여러 겹 겹치면서 다수로 보여진다. 다중적 자아의 환상……이 환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비디오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이다. 비디오는 화면을 디지털화하기 때문에, 몽타주를 통해 손쉽게 이미지와 시간을 재생하고 반복하고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구자영은 광고에 흔히 쓰이는 라이트 박스를 미술관 안으로 끌어들인다. 작가 외에도 미리 녹화된 작가 이미지 두 개를 벽 위로 투사하면서 내부의 형광등 사진을 라이트 박스 위에 붙였다 떼는 행위를 보여준다. 관객들이 보는 내부의 형광등 사진은 물론 실체가 아니라 그저 이미지다. 비슷한 세 개의 행위가 진행되다가 다시 겹쳐져서 하나의 라이트박스 위로 모아지는 순간, 라이트박스의 형광등이 환해지면서 모든 환영이 다 날아가 버리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환영이고, 한번의 반전이 더 남아있다. 작가가 라이트박스에 전원을 연결하는 순간, 진짜 빛이 들어온다. 마치 하나, 둘, 셋하며 갑자기 최면에서 깨어나는 기분이다. 디지털신호였던 이미지가 강력한 실체의 빛에 의해 스스로가 환영임을 인정하고 무기력하게 물러나는 듯 보인다. 생각해보면 디지털 정보를 읽어온 것이긴 했지만, 투사되는 이미지 역시 빛이다. 이 빛이 실체에 의해 내쫓긴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라이트박스 속의 광원-형광등 빛이 실체인지는 모호하기만 하다. 우리는 여전히 라이트박스 속에 있다고 믿어지는 길쭉한 모양의 형광등을 본 적이 없다.
비디오를 통해 이미지가 빛으로 전달될 때, 이를 매개하는 것은 디지털의 기본단위인 bit이다. 0아니면 1인 두 자리 숫자(binary digit)에 불과한 bit가 집합을 이룬다면, 이를 이미지나 정보의 실체로 받아들이는데 이론상의 문제가 없다. 이 bit의 등장은 무수한 변화의 하나일 뿐, 인간은 환경과 매체에 따라 그의 시지각 행위를 발달시키며 잘 적응해왔다. 멀티 미디어가 만들어낸 시각의 여러 층위가 존재하고 시뮬레이션 공간까지 실제로 인식되는 현대에서도 우리는 이미지를 즐긴다. 익숙한 풍경들 사이에서 변화만을 눈치채고, 매일 보던 것 가운데서도 그 순간의 심리에 따라 새롭게 와 닿는 것이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미지란 시각이 재생산된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이미 사물을 보는 방법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수영 / 일민미술관 기획실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메트로놈_안수진 비디오/키네틱 설치전
안수진의 작업은 움직이는 조각작업이다. 움직이는 조각이라면 키네틱 아트를 떠올리게 되는데, 움직이는 현상에 주목하는 일반적 키네틱 아트와 달리 안수진식 키네틱의 움직임은 주관적이고 주체적이다. 기계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작가의 생각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예전에 만났던-그렇다. 봤던 것이 아니라 만났던 것 같다-안수진의 는 바로 작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세상의 번잡함과는 상관없이 한 길을 고집하며 묵묵히 앞을 향해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팽창, 수축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라는 작업은 흔들의자 위에 앉아 길고 긴 노를 저으며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평형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작가의 투영체다. 은 어떠한가. 기계로 사랑을 표현하다니……낚시대를 가지고 하트 모양을 그려내는 작가의 마음에서 익살스러움까지 엿본다. 안수진의 작업은 모터장치까지 달고 있는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생명력과 감수성을 지닌 따뜻한 존재로 다가선다. 작가는 이 단계를 실존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풀어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이후 작가는 사회적 문제, 즉 현대사회가 낳은 정치적 문화적 오류들에 대해 관심의 영역을 넓힌다. 작가 내면의 서사에서 한걸음 나가, 밖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새로운 변화와 시도를 전개한다. 아니다. 어쩌면 이 변화는 새로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386세대로서의 작가에게 20년 전의 사건은 이미 그때부터 작가의 머리에, 마음에 맴돌았을 테니까.
이번 전시의 ‘stereo 수조’는 박종철의 이야기다. 아카펠라 풍의 ‘Mr. Sandman’ 음악과 물 속으로 쳐 박힌 확성기에서 나오는 “몰라! 몰라!”라는 외침의 충돌은 서로 다른 주장의 집단 사이에서 느껴지는 슬픔이다. ‘메트로놈’이라는 작업에서도 확성기의 형태가 보여진다. 그러고 보니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의도는 확성기에 담겨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타인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크게 알리는 확성기 말이다. 일정 정도까지는 상대에게 유익한 존재이지만, 지나치면 없애고 싶은 쓰레기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네트워크 형성을 위해 마련된 장치인 기계문명이 그 장점에도 불구하고 벗어나고픈 필요악으로 존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번 전시「메트로놈」은 우리 사회에 장치되어있으나, 그러나 보이지는 않는 어떠한 규칙들에 대한 안수진의 서술이다. 따뜻한 기계미학은 이제 문명에 비판적인 허무주의로 흐른다. 인적(人的) 네트워크가 수월해진 현대사회에서 오히려 인적(人的) 소외감을 느끼는 현실은 아이러니다. 안수진이 움직이는 조각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은 관객 자신, 우리 자신이 바로 지금 경험하는 현실의 모습이기도 하다.
김태령 / 일민미술관 디렉터

참여작가
구자영, 안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