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의 눈
In the Eye of the Tiger
1998.01.15.(Thu) ─ 1998.02.28.(Sat)

오늘날 물질 지향적인 현대소비사회에 대응하여 정신적 지침 대를 필요로 하는 현대인의 상을 호랑이라는 상징적인 메타포로 설정하고 한국현대미술의 한 단면을 기획해 보았다.
97년 뉴욕의 엑시트 아트에서 열렸던 전시로서 한국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 열 명의 작품들이 선보이게 된 ‘호랑이의 눈’전은 한국미술의 총체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동시대의 사회적 변이들이 초래한 다양한 문제들로부터 비롯된 개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환기 및 변화하려는 그들의 의지에 해한 욕구를 탐색하려 한다. 고도의 테크놀로지 발달과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초래한 현대인의 소외현상, 性적,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며 그들 작품을 통해 개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연금술 적인 변화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과거 수세기 동안 사회, 정치적 격동기를 겪어온 한국은 샤머니즘과 불교, 유교, 자연으로부터 위안을 찾으려는 종교적, 정신적 힘을 재현하려는 현상과 급격한 경제성장과 산업발달로 현대소비사회가 초래한 물질지향주의적인 현상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이승택의 불, 물, 바람을 제재로 한 극적인 환경 미술작품은 자연 중심적 유심론에 입각한 창조와 파괴의 순환과정을 표현하였고, 자연과 자신, 기억과의 대화를 나누는 임충섭의 설치작품은 공간의 우주적 감각을 연출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억의 공간 속의 시간의 경로를 측정하는 도구로서 초현실적인 시간의 의미를 지닌다. 이와 반대로 육태진의 한국 전통가구를 제재로 한 ‘유령가구’는 두 개의 서랍이 자동으로 닫혔다가 열리는 것을 반복한다. 서랍 속에 설치된 비디오 영상은 관객들을 등진 채 끊임없이 계단을 오르는 작가자신의 이미지로서 퇴보적 의미보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계층상승에 대한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1970-1980년대 권위주의적 정권 하에서의 사회 정치적인 문제와 엘리트 중심주의에 반항하고 비판적이던 민중미술계열의 대표적인 작가들과의 관련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임영선의 ‘풍요로운 나라’는 사회에 대항하고 강요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상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형판에 찍혀 나온 모습들은 플라스틱 상자 속에 담겨 ‘갇혀있음’을 강조하려는 것 같고, 천천히 회전하는 48개의 얼굴들은 상자의 내벽에 눌려지면서 고통스럽고 질식하는 듯이 보인다. 권위주의적 정권 당시의 정치적 가치와 반동적 요소를 함축한 사진의 이미지와 언어, 오브제들을 나열한 윤동천의 설치작품에서 나타난 선동적인 요소들은 사회 정치적, 개인적, 지역적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여성문제를 다룬 박화영의 ‘티슈일기’는 화장한 얼굴을 티슈에 눌러 새긴 흔적의 자화상이다. 벽에 나열된 얇은 티슈들의 흔들림은 쉽게 무너지기 쉬운 정체성에 대해 섬세하게 그 감성을 전달하는 가운데 자신의 내면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공식적인 여성상에 대한 경계심과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김명혜의 ‘소외된 숨’은 열과 물, 증기, 압력기, 전기, 무쇠를 제재로 아름다움과 공포를 동시에 전달하는 묘한 힘이 있다. 수십 킬로와트의 전기로 거대한 코일이 극도로 뜨겁게 달구어지면서 천천히 물 속 깊이 잠길 때 격렬하게 끓으며 증기가 뿜어 나오는 과정은 사회로부터 겪는 스트레스와 그에 따른 정신적 문제들을 상기시킨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새로운 과학기술과 복합적인 대중매체 문화의 적극적인 도입 그리고 본격적인 정보화 시대의 도래는 지구촌 문화의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장소에 대한 인식과 국가적 정체성,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비디오 작가 홍성민의 ‘리어 윈도우(Rear Window)’는 9개의 스크린이 설치된 벽의 역방향으로 비디오 프로젝션을 설치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각기 다르게 펼쳐지는 폭행장면을 엿보게 한다. 이와 같이 반복되는 행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여주기도 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충격을 주거나 민망함을 느끼게 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내재해 있다.
김영진의 프로젝터, 액체, 콤프레서를 제재로 시간에 의해 여과되고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작품을 연출한다. 순환하는 액체가 담긴 탱크를 통해 벽면으로 투사된 빛은 물방울과 언어, 이미지로서 연속적으로 변하며 프로젝션 스크린 위에 순식간에 뿜어 나온 물방울들은 주위의 소구체들과 점점 결합됨으로서 전면을 공유하게 된다. 스크린에 떠오르는 투명한 활자들은 마치 여과된 상투성의 개념과 흡사하다. 여기서 탱크와 프로젝션은 재순환과 함유성,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인식되며, 반복적으로 투사되는 이미지들은 육체와 정신이 교류하는 어떤 상태를 암시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미국에서 활동해 왔던 한국작가들의 미술양상은 언어의 장벽과 타 문화에 대한 이질감에서 야기된 개인의 정체성,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을 비판하고 대안하려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민중미술과 비교해 볼 때 형태적 양상이나 의미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를 통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현상에서 나타나는 개개인의 자각을 심리적인 관찰을 통하여 시각적으로 표출하려는데 있다고 하겠다.
뉴욕에 거주하는 조숙진은 버려진 가구들을 수집하고 형상화하여 추상적인 조각으로 변형시킨다. 벽면에 붙어있는 서랍들은 정신적인 의미를 함유하고 있으며, 이것은 드러남과 은폐를 동시에 공존시키는 의미를 지닌다. 그의 작품은 우리를 향해 열려있지만 사실은 벽자체가 실제용기이기도 하며 우리는 단지 상상으로만 그 내용물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김유연 / 독립전시기획자

참여작가
김명혜, 김영진, 박화영, 육태진, 윤동천, 이승택, 임영선, 임충섭, 조숙진, 홍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