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White & Pink_김광열 개인전
Black, White & Pink_Kim Kwang Yeol Solo Exhibition
2011.03.18.(Fri) ─ 2011.05.08.(Sun)
Exhibition Hall 1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질문을 던지곤 할 것이다. 삶의 시작은 어디에 있었고, 또 이것이 끝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이 삶이 나에게 주어진 의미는 무엇 인가. 그 주어진 시간 동안 내가 이루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내게 행복을 주거나 두려움을 주는 것은 무엇 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 일까. 하지만 근원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은 삶 자체의 소용돌이 속에서 점차 잊혀져 버린다.
분주한 일상, 사회적 속성, 숨 가쁜 생존경쟁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코앞의 일에 치이며 바쁘게 살아가기에 급급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삶의 목표를 깨닫고 또 이상적이게도 그 의지가 보편적으로 존중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면 사회는 좀 덜 혼탁할런 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사람들을 예술가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김광열 작가는 일단 사회적 파워게임에서 졌다. 그는 대학에서 미술공부를 하지 않았고-대학원에서는 전공을 했지만- 작업발표 기회가 많지 않아 알려지지도 않았다. 성격이 외향적이지 못하니 대인관계도 폭이 좁은데다 일찌감치 샌프란시스코로 떠나 홀로 지내고 있다. 그는 더구나, ‘게이’다. ‘스펙’이 좋아도 생존하기 힘든데, 뭐하나 딛고 일어설 것이 없어 보인다. 작가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버리고 만다.
김광열 작업의 상당 부분은 자화상으로 이루어있고 이 자화상들을 통해 자신의 심리적 상황을 표현해왔다. 초기(1980년대 후반)의 자화상은 이중적 이미지를 지닌 자신의 일상에 대한 서술을 담아낸 실내풍경화 작업이다. 퀴어적 성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듯한데, 이미지와 사물들이 명확하지 않고 복합적인 인물 군이 혼재한다. 작가는 1991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림뿐 아니라 게이역사에 대한 공부도 접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서울에 잠시 돌아와 보다갤러리에서 전시한 작업에서는 밀폐된 공간 속에 선명한 붉은 색의 유기체적 형체가 부유하는 것이 반복적으로 보인다. 게이문화에 대한 이론적 접근 후 정체성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일정 정도 극복해내고, 생명이 있는 물체 또는 물성에 대한 과감한 접근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유추해본다.
지금 그가 거주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자그마한 아파트. 도시 밖이 내다보이는 작은 창과 천장 위에서 늘어뜨려진 전구에는 붉은 셀로판 종이가 붙어있다. 김광열은 “그걸 통해서 바깥을 보면 색깔이 되게 예쁘다”며, “해가 지는 모습도 재미있어 보인다”고 하고는 “나만 그런가?”하고 혼자 되 뇌이듯 묻는다. 그의 눈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쫓는다. 낡은 테이블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인형들과 캐릭터들, 크리스마스 장식용 나무를 끌고 가는 가족의 모습이 그려진 카드는 어린 시절의 동심과 가족에 대한 동경을 담고 있는 듯하다. 지극히 개인적 공간에서 김광열은 자신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그가 정확히 의도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파워게임에서 졌기 때문에라도 김광열은 자신의 근원에 관한 작업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근래의 자화상-작가는 자아상自我像이라고도 한다- 작업은 형상이 명확한 구상화 형식을 갖추며 일정한 코드를 드러내 보인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곳곳에 드러나는 ‘분홍(핑크)’이라는 색깔이다. 작가에게서 들은 역사의 한 부분. 나치 강제수용소에서는 수용수들을 식별하는 방식으로 역삼각형 배지를 달게 했는데 게이에게는 핑크색을, 유태인에게는 노란색을 달게 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김광열의 그림에서 보이는 인물은 종종 분홍색 속옷을 입고 있는 것이 역삼각형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작가가 게이의 역사를 단적으로 표해내는 징표로, 직접 배지를 붙이지 않고 분홍 속옷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은 자신을 밖으로 들어내지 못하고 속으로 가리고 있어야 하는 인물의 현실을 반영하려 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아상’에서 작가의 존재는 촛불이 되기도 하고, 흑인이나 백인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때론 성 구분이 모호한 여성적 존재로 때론 성자(聖子)의 의상을 입은 종교화 속의 인물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여전히 인물들은 불안정한 요소들을 담고 있고 돌아가지 못하는 집, 짧게 살다가는 나방, 경계를 가르는 담벼락이나 벽은 심리적 장애를 더한다. 그들의 분홍셔츠는 결코 화려하지 않고, 그들은 미소인지 울음인지 모호한 표정을 띠고 있으며, 타고 있는 양초는 빛을 발하고 있지만 밝지 않음이 병치되어 있다. 영원을 말하고 싶은데 영원하지 않다. 행복하고 싶다 보니 행복할 수 없는 조건들이 더욱 드러난다.

최근 김광열 작가는 다시 한번 전환점에 선 듯하다. 일민미술관이 김광열의 전시를 제안하던 즈음, 인물상이 아닌 중형 사이즈의 분홍그림이 1-2점 있었는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는 이 ‘분홍’ 연작에 집중하여 작업했다고 한다. 핑크색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배경이나 심리적 갈등에서 일정 정도 벗어나되 ‘핑크’가 작가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준 듯하다.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즉흥적이다. 여기에는 만화를 즐겨 그리던 어린 시절의 경험도 보태졌으리라 본다. 연필로 그리다가 맘에 안 들면 지우고 고치던 유년의 반복적 행위는 화폭 위에서 중첩되면서 서술적이기 보다는, 직관적 아름다움을 쫓는 무한의 행위로 변화하고 있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할, 어떤 세계로의 초대이다. 작가에게 그림은 삶의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그림으로 자신을 깨닫게 된다면, 그가 인생의 파워게임에서 졌는지 이겼는지 그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
김태령 / 일민미술관 관장 겸 기획실장

참여작가
김광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