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열두 고개 넘기> 김진주(아그라파 소사이어티)

《Fortune Telling: 운명상담소》연계 리서치

김진주
미술작가이자, 큐레이터, 시각예술문화 연구자 등 역할의 경계 넘나들며 미술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개인전 《지진계들》(합정지구, 2020)을 선보였고, Ashkal Alwan 주최의 《Home Works 7》(2015), 《5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16), 서울시립미술관의 비서구권 전시 시리즈 《고향》(2019) 등의 단체전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팟캐스트: 말하는 미술〉의 메인 진행자(2015~2016)였고,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 『제노 페미니즘: 소외를 위한 정치학』(미디어버스, 아그라파 소사이어티, 2019)을 공역했고, 페미니즘/퀴어 감각의 시각예술문화 웹저널 “SEMINAR”(2019~)를 기획한다. 연구 저작물로는 「선언의 관점에서 본 예술가의 사회적 발화」(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학전공 석사학위논문, 2016)가 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해 있다.

아그라파 소사이어티
아그라파 소사이어티 Agrafa Society는 김진주, 이연숙, 이진실로 구성된 기획 & 출판 콜렉티브다. 아그라파Agrafa는 ‘문맹의’ 또는 ‘문자 체계가 없는’을 뜻하는 스페인어 형용사의 여성형으로, 아그라파 소사이어티는 문법 없이도 가능한 쓰기의 사회를 꿈꾼다. 리서치 기반의 프로젝트에 주목하여 시각 문화와 동시대 예술에서의 의미심장한 신호를 포착하고자 하는 활동으로서 웹저널 〈SEMINAR〉를 발간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역사의 지속성과 함께하는 우리의 불행을 끈질기게 말해야 한다.”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1]

불길하고 불운에 휩싸였다고 느낄 때 자신의 운명을 찾아보게 된다. 이 불행의 기운이 짙을수록 운명은 깊은 곳에 잠들어있기 마련이다. 운명은 잘 찾아지지 않고 자신을 언제 엄습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눈앞을 두텁게 메운다. 이럴 때면 지금의 나와 같이 운명의 고개를 어렵게 넘어갔을 선행자의 운명은 어떠했나 찾아보게 된다. 그 앞선 좌표에 맞추어 나의 앞길이 어떠할지를 점친다. 그래서 아카이브의 길고 깊은 선반 구석에서 놓였던, 앞선 한 작가 B의 작업노트 겸 드로잉북에 대한 기억을 습관적으로 찾아 들춰보곤 한다. 아카이브 목록에서 아직 공개하지 않은 이 드로잉북들을 운 좋게 봤을 때, 마치 운명의 비기(祕記)를 들춰보는 것 같았다.

B는 드로잉북을 1년을 주기로 한 권씩 남겼다. 드로잉북을 실제 써보면 알지만 해마다 한 권씩만을 채우기는 여간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다. 이는 우리 각자의 운명의 시간을 살아내는 의지의 축소판과도 같다. 보통은 너무 많이 써 1주일 만에 한 권을 다 써버리거나, 1주일 이후에는 쓰다만 채로 비워지게 마련이다. 그가 이토록 강한 의지로 강박적으로 점쳐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비밀스러운 예언록의 한 장 한 장에서 작가는 ‘좋은 그림은 무엇일까?’라는 작가적 운명의 질문을 반복적으로 상기하며 고뇌했고, 그 운명에 답해야 할 자신의 행동을 1년을 한 달로, 한 달을 다시 하루하루로 나눈 격자 위에 적어나가며 지시했고, 미래의 건강과 인연에 대한 걱정을 헤쳐나갈 방향을 가늠하는 지혜와 조언을 곁에 두었다. 그런데, 이 비기가 지시한 방향이 그의 운명에 드리운 암운을 잘 걷어주었을까?

운명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피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운수는 타고났다고들 생각한다. 사주팔자(四柱八字)의 뜻이 바로 이것이다. 태어난 순간의 년, 월, 일, 시의 4가지 기둥을 다시 아래위의 2개로 나누어 8개의 글자로 조합한 것을 사주팔자라 한다. 어느 순간에 태어났는가. 그 시간의 한때가 한 사람이 살아갈 목숨과 처지를 결정한다는 개념이다. 이는 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경계를 구분하는 좌표를 대입해 살아온 날들의 경로를 이해하고 앞날의 방향을 예측하려는 ‘시간의 부호’[1]이자 ‘시상점(時相占)’[2]의 성격을 띤다.

시간은 언제 지나갔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돌아오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계절, 밤과 낮이 반복해서 돌아오고, 죽음이 있으면 누군가 태어난다. 이 자리를 다시 찾아오는 시간의 고리는 정해진 운명으로 바뀌어 인간을 사로잡는다. 이제 다가올 운명의 이유를 찾고 그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나거나 예비할 수 있는 수를 계산해야 한다. 태어난 때의 4개의 기둥처럼 1년은 4계절로 바뀌고, 세상은 태양, 지구, 바다, 하늘의 4요소가 구성하고, 신체를 구성하는 4개의 체액은 개개인의 성질을 발현시키고 운명에 영향을 준다.[3]

4와 2와 8만이 운명의 방정식은 아니었다. 사주의 범위인 60갑자는 10개의 간(干)과 12개의 지(支)를 짝지어 낸 값들이다. 되풀이하는 순환 반복적인 구조를 띠는 60년의 주기에서 환갑이나 회갑을 살면 같은 간지의 해를 다시 맞이한다.[4] 12지지는 하루의 시간을 나누는 방법이기도 했다. 12운성은 4주의 아래와 위가 만나서 짚어내는 출생, 출세, 쇠락, 죽음 등 인생의 12가지 분기점들이다. 길한 것과 흉한 것의 2배수를 적용한 신살(神殺) 중에 비중 있는 것을 추려 12신살이라고도 한다. 점성술은 12개의 별자리를 기본으로 한다. 이 황도 12궁은 명리학의 12지지와도 유사성을 보인다.[5]

어쨌든 이러한 여러 계산법은 모두 보이지 않는 운명을 추리하려는 궁리의 소산이다. 계산법이 있으면 아무리 복잡한 일도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W. G. 제발트가 언급한 1890년대 이탈리아어책의 대조된 사물의 단어장이 보여주는 것처럼[6] 항상 쌍으로 다니는 행운과 불운의 상관관계 사이에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값이 산출되긴 할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미래의 값의 정확성을 현재에 증명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좀더 시각적인 예를 찾아보자. 프톨레마이오스의 “테트라비블로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슬람과 유럽의 점성술과의 연결성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사례인 조선의 점성술책 중 “성요(星要)”는 탄생한 시각의 천체들 위치에 따라 12위의 곡선을 그려 개인의 명운을 점치는 방법을 담고 있다.[7] 방식은 이러하다. 한 지점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12개의 공간을 나누는 곡선을 그린다. 중심이 되는 점은 현재 위치에서 바라보는 지평선의 북쪽 한계가 되고 동쪽 지평선에서부터 차례로 수명, 가족관계, 재물과 직업운 등 인간 삶의 중요한 12개의 국면을 점치는 12개의 자리가 반시계방향으로 놓인다.

이 곡선 위의 좌표를 다시 직선의 좌표에 옮겨 그려야 운명의 별점을 알아낼 수 있다. 긴 직사각형의 가운데 내부에 면을 접하는 마름모와 다시 그 마름모의 내부에 면을 접하는 작은 직사각형을 이루는 직선들로 나누어 12개의 삼각형의 공간을 분할하고, 왼쪽 중앙의 삼각형을 시작으로 반시계방향으로 곡선의 성반 위에 있던 12위를 옮긴다. 중앙의 빈 사각형에는 운명을 점칠 이의 생년월시를 쓴다.[8] 1개에서 12개까지의 점을 그리는 사이, 다시 12개의 점을 곡선에서 직선으로 옮겨 놓는 사이에 운명의 의미는 번득이며 스친다. 그것을 지나가 버리지 않게 잡아채 현상해내는 것이 바로 전달자이며 기호이다. 이렇게 시간 속의 연결되는 성질을 이으며 사이사이의 쓰이지 않은 것을 읽는 점성술의 능력을 벤야민은 강조했다.[9]

그를 따라 아비 바르부르크가 집어낸, 언어와 문자 이전 동물의 내장이나 별들의 움직임에서 유사성을 찾아내고 감응해 온 또 다른 증거 중 하나가 바빌로니아 시대의 간점술(hepatoscope) 모형이다. 바르부르크는 점토로 만든 양의 간 모형에서 역사적이고 지정학적으로 상이한 문화들 사이의 이주/이식하는 운동(mobility)을 읽어냈다.[10] 브리티시 뮤지엄 소장품을 비롯해 점을 치는 신성한 간들은 신체 중 영혼의 자리로 여겨지는 간의 부분들을 닮게 굴곡진 혹과 평평하고 두툼한 덩어리의 점토로 만들어졌다. 그 면적의 표면에는 직선들이 교차하며 사각형의 공간을 만들고 각각의 작은 면들에는 예언이나 법을 옮겨 적은 듯한 문자들과 균일한 크기의 오목한 구멍이 파여 있다. (이보다 후대에 만들어져 전반적으로 간의 모양보다는 좀 더 추상화된 조형성을 띠는 이탈리아 피아첸차의 모형을 보면, 격자가 아니라 어느 한 점에서 출발해 사방으로 파생되는 면적을 일정하게 분할하는 직선을 쓰는 방식으로 글자가 쓰이는 면을 만들었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바르부르크를 연구한 책에서 신비한 체스 게임에 간점술 모형의 기하학적 분할을 비유하며, 메소포타미아의 점복 문화 연구의 권위자인 장 보테로가 말한 점복술의 연역적 특성을 강조한다. 별의 움직임, 돌,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의 외형적 골상에서 내면의 꿈의 모습과 같은 단순한 현상에 대한 관찰로부터 어떻게 우연의 게임 속 배열된 조각을 골라내어 정교한 상황을 분석하는 힘은 이 연역적 추리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 이는 경험적 정교함과 상징적 증폭력이 결합한 감각적 지식에 대한 지적 구성력을 발휘하는 과정이다.[11] 이와 같은 해석적 능력이 있어야 데이터의 자리가 마치 별자리인 양 다루는 가짜 예언에 속아 넘어가는 불운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12]

 

[1]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성정혜, 이경란 옮김(후마니타스, 2021), 290.
[1] 김만태, 신동현, ‘명리학에서 시간에 관한 논점 고찰—자시를 중심으로’,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59(2014.3), 431.
[2] 앞의 글, 462.
[3] 김성현, ‘4액체설의 멜랑콜리와 명리학의 문학적 적용’, “문학과 종교” 제22권 1호(2017), 24-25.
[4] 김만태, 신동현, 앞의 글, 434.
[5] 김성현, 앞의 글, 34.
[6] W. G. 제발트, “현기증. 감정들”, 배수아 옮김(문학동네, 2014), 102-103.
[7] 전용훈, ‘서양 점성술 문헌의 조선 전래’,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4권 제1호(2012), 1-2, 27.
[8] 전용훈, 앞의 글, 28-29.
[9] 발터 벤야민,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선집 6, 언어 일반과 인간 언어에 대하여, 번역자의 과제 외”, 최성만 옮김(도서출판 길, 2008), 215.
[10] Georges Didi-Huberman, Atlas, or the Anxious Gay Science, Trans. Shane B. Lilli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8), 17-18.
[11] Ibid., 19-20.
[12] 이 문장은 특히 다음의 사건을 생각하며 썼다. [e글중심] ‘뜨거운 감자, ‘나쁜 이대남’ 그래프’, 중앙일보, 2021년 7월 2일. https://news.joins.com/article/24096796(2021년 7월 8일 검색). ‘‘이대남’만 고소득일수록 남 안돕는다? 논란된 그래프’, 한국경제신문, 2021년 6월 27일.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21062713637(2021년 7월 8일 검색). 김신영, KBS ‘나쁜 이대남’ 그래프, 응답자 없는 구간을 추정치로 채웠다’, 조선일보, 2021년 6월 30일. https://www.chosun.com/economy/economy_general/2021/06/30/VFG5HRRWIBC7DNPB4DZ42DKY4M/(2021년 7월 8일 검색).

 

* 이 에세이는 일민미술관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국고 보조금을 지원받아 수행한 ‘2021년 사립박물관 미술관 온라인콘텐츠 제작지원 사업’의 결과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