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짐승의 운명, 추방과 순수의 유토피아> 길드다

Fortune Telling: 운명상담소연계 리서치

팀 <길드다>는 인문학을 통해 삶의 자립을 꿈꾸는 청년들의 모임입니다. 오늘도 다양한 인문학적 주제를 아우르며 강좌, 세미나, 전시와 네트워킹 활동을 벌여나가고 있습니다. 더 많은 길드다의 활동을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사이트를 참고 바랍니다. (https://guild.tistory.com/)

글쓴이 차명식은 팀 길드다 소속의 필진입니다. 대학에서는 인류학을 전공했지만 그 외에도 관심을 갖고 공부한 여러 주제들로 글을 쓰고 다양한 이들과 나누어왔습니다.

한때 신이었던 짐승들

죽은 동물의 가죽 위로 유토피아의 풍경을 그려낸 <가죽회화 연작>과, 고통 받는 자연의 역습을 밤하늘의 별자리로 그려낸 <팬데믹 별자리 연작>. 장종완 작가의 이 두 연작을 보며 나는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그린 어떤 이야기를 떠올린다.

끝없이 펼쳐진 삼림의 가장자리에 철을 만드는 인간들의 마을이 있다. 천민들과 여인들, 심지어 나병환자들까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약자들이 세운 그 제철장은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삶의 터전이자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최후의 요새다. 하지만 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용광로를 달구기 위한 막대한 장작이 필요한 법. 제철장이 숲을 빠르게 갉아먹기 시작하자 숲의 주인인 동물신들은 분노에 휩싸여 휘하의 동물들을 이끌고 제철장의 인간들과 전쟁을 벌인다. 참혹한 전투 끝에 신들은 총에 맞아 하나 둘 죽어가고, 마침내 동물신들의 정점에 선 신이자 생명 그 자체라고 하는 ‘사슴신’마저 인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평온히 살 수 있는 안락한 삶터 –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서는 신이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며 각오를 다지지만 사슴신이 죽은 그 순간부터 거대한 저주가 대지를 뒤덮어 모든 것을 파멸시키기 시작한다. 인간들은 뒤늦게 달아나기 시작하나 어디에도 도망칠 곳은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의 이야기다. 이 애니메이션의 시대적 배경은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1336년 – 1557년)인데,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신이 살고 있는 성스러운 땅으로서의 산과 숲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쯤’이라고 짚어내면서 ‘<모노노케 히메>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는 실화라고 할 수도 있다’며 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한때 신으로 숭상 받던 동물들은 언제부터 ‘짐승’으로 내몰리기 시작했을까? 언제부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되고 인간 아닌 것들은 지배와 착취의 대상인 짐승으로 전락하였을까?

 

너와 나,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다

인간과 짐승의 구별이 이토록 뚜렷하게 이루어진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간이 동물을 형제나 친우로 여긴 것은 전설적인 에덴동산에만 있는 이야기거나 환경주의자들이 최근에야 만들어낸 프로파간다가 아니며 우리는 세계에 흩어진 인간 문명 곳곳에서 그 흔적을 포착해낼 수 있다.

가령 북미 대륙 북서해안 지방의 톰슨 인디언 설화에는 야생 염소와 결혼한 젊은 사냥꾼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는 염소가 인간의 모습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인간이 염소의 모습이 되기도 하며 인간과 염소가 서로 관계를 갖고 아이를 낳기도 한다. 또 <모노노케 히메>의 모델이 된 일본의 선주민족 아이누 족에는 ‘유카라’라 불리는 서사시들이 전해지는데 이 시들은 동물과 인간을 넘나드는 여성 혹은 자연신들이 1인칭으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특징을 갖는다. 그런가 하면 남미의 파파악타 부족은 죽은 친척들이 푸마나 재규어 같은 정글의 맹수들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다. 이러한 설화와 믿음들은 해당 사회들에서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소비되는 것들이 아니다.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과 동물이 지극히 가까운 존재임을, 그리하여 스스로 동물이 되어 동물의 입장에서 사고하는 방법을 배우며 그 앎은 그들을 더욱 뛰어난 사냥꾼으로 만들어 줄 뿐 아니라 자연의 질서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높여 자연과 그들 사이에 지속 가능한 공생 관계를 구축토록 한다.

위에서는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부족사회들을 예시로 들었으나 그보다 큰 규모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믿음은 꽤 오래도록 유지되었다. 이미 말한 일본의 경우도 그렇거니와 조선의 경우도 호랑이를 산왕 혹은 산신으로 모시는 신앙이 존재했고 이는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민간신앙으로서 일부 잔재한다. 이러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결정적인 변화가 발생한 것은 사실 근대철학의 등장 이후라고 보는 편이 옳다. 바로 코기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와 함께이다.

르네 데카르트가 주창한 이 유명한 명제는 ‘생각하는 주체’로서 인간 존재를 발명한 동시에 ‘생각되어지는 대상’으로서의 세계를 발명했다. 즉,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과 인간에게 인식되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이분법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인간은 어떻게 하면 세계를 더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을까에 매달리기 시작하며 그로부터 합리주의와 근대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과 자연은 더욱 극명하게 분리된다. 탐구하는 자와 탐구되는 자, 호명하는 자와 호명당하는 자. 다시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이 강력한 이분법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세계를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점점 더 강화하면서 그 가운데 그를 뒷받침할 다양한 사상적·윤리적·법적 장치들을 발명한다. 그 핵심이 인간의 권리, 인권이다.

 

인간의 권리, 짐승의 굴레

권리라고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것을 누리는 자와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자의 대조 속에서 구현된다.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포착되기 위해서는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이 주변에 보여야 하고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포착되기 위해서는 국가에게 보호받지 못하는 자들이 주변에 보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누리는 ‘자유로운 인간’의 주변에는 ‘구속된 짐승’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자유인들의 유토피아와 추방당한 짐승들. 인간의 운명과 짐승의 운명. 명심할 것은 짐승의 운명이 꼭 ‘동물’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근대에 발명된 인간의 기본권이라 말해지는 권리들 중 상당수는 불과 한 두 세기 전까지만 해도 오직 건강하고 어느 정도의 재산을 지닌 성인 백인 남성들이 독점하던 것이었으며 대단히 오랜 시간 동안 빈민, 유색인, 여성, 아이, 장애인과 병자와 기타 소수자들은 짐승의 굴레 속에 있었다. (물론 오늘날에도 이 굴레는 완전히 벗겨지지 않았다)

헌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인들의 유토피아에도 파국이 찾아온다. 인간의 권리를 확고히 하며 인간이 될 수 있는 자에 제한을 둘수록 점점 더 짐승들의 수는 늘어만 갔다. 덩달아 그들에 가해지는 폭력과 착취의 강도도 날로 강해져지면서 유토피아에는 불온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결국 짐승으로 취급받던 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곳곳에서 혁명과 저항의 물결을 일으키고 자연의 파괴는 걷잡을 수 없는 재해들로 이어졌다. 이를 마주한 유토피아의 인간들은 뒤늦게 질겁해 허둥대다가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대응에 나선다. 그들은 짐승에 대해 두 가지 방식의 전략을 취한다 : 그들을 인간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두려움의 대상이자 통제를 되찾아야 할 존재로 만들거나.

첫 번째 전략인 ‘인간으로 받아들이기’부터 살펴보자. 수세기 전에 비해 인간의 정의와 인권 개념의 적용이 더욱 폭넓어졌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날 더 이상 가난한 이들과 유색인, 여성과 아이, 혹은 장애인과 병자들과 성소수자들을 두고 감히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은 없으며, 설사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존재하더라도 그들은 곧 배척의 대상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나아가 자연과 대해서도 일종의 ‘의인화’를 시도하여 인간과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으로 양쪽 사이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물권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일반적으로 동물권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동물권은 그 적용 대상이 인간에서 동물로 바뀌었을 뿐 내용적 측면에서 인권과 거의 큰 차이가 없다.

한편 두 번째 전략 ‘더욱 두려운 존재로 만들기’도 우리에게 제법 익숙한 것이다. 어떤 소수자들의 경우에는 마지못해 인간으로 받아들였음에도 여전히 두려운 존재로서의 이미지가 조장되기도 한다. 이들은 사회의 인간의 겉모습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그리하여 사회의 ‘건전한’ 정신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또 자연 역시도 때때로 이 전략의 대상이 된다. 지금까지 인류가 이룩한 눈부신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대상으로서의 자연, 외경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자연의 형상을 만들고 그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흔히 ‘인간의 오만에 내려진 천벌’과 같은 수사가 동원되며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들이 매개가 되었다는 점에서 작금의 코로나 팬데믹도 종종 이 전략의 대상이 된다.

사실 이 두 가지 전략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양쪽 모두 인간과 짐승 사이의 경계를 더욱 명확히 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즉 이 전략들은 이편으로 넘어오게 하거나, 아니면 저편으로 더욱 멀리 보내거나의 양자택일이다. 이러한 경계의 강화는 실은 대단히 많은 것들을 은폐하며 우리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평등한 인간”이라는 테제 아래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불평등과 차별은 얼마나 많은가? 동물이나 식물을 인간과 똑같이 대우하는 것은 과연 ‘올바름’인가? 오히려 인간의 잣대로 동물과 식물의 행복이나 불행을 평가하려는 오만은 아닌가?

또한, 한편으로 두려워해야 할 자연의 형상을 만들고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더욱 철저하게 강조한 결과는 인간의 굴복 혹은 자연의 정복이라는 뻔한 선택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 외에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모를 인간과 자연 사이의 다른 관계의 가능성들을 파묻어 숨기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이는 가능한 전략인가? 우리는 ‘자연의 분노’인 코로나 바이러스를 영원히 우리의 영역 경계 저편으로 추방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전략들을 통해 우리는 순수한 인간의 유토피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나누어진 바 없던 운명에 대하여

만약 이 모든 질문들이 회의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접근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인간과 자연이 맺을 수 있는 관계에 대하여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해석해 봐야할 필요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인간과 자연이 맺을 수 있는 이상적인 관계를 묘사할 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 중 하나는 ‘더불어 산다’는 말이다. 이미 이와 같은 말들이 귀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탓에 우리는 보통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고 이 문제를 지나치기 쉽다. 그런데 더불어 산다는 건 정확히 어떻게 함께 살아간다는 뜻일까. 아마도 서로의 의사를 존중하며 배려하면서 충돌할 때는 타협점을 함께 찾아나가는 삶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자연-짐승은 말도 할 수 없고, 우리는 짐승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인간 멋대로 짐승을 사람처럼 대하면서 일방적인 애정을 쏟아 붓는 것이라면 또 몰라도 짐승과 ‘서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하여 나는 조심스럽게 ‘그렇다’고 말하려 한다. 우리는 이 글의 앞선 부분에서 스스로 동물이 되어 동물의 사고에 이름으로써 그들과 함께 살고자 했던 부족들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물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차이들로 인해 우리가 그들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의 주변에서도 그 가능성들은 여전히 발견된다. 가령 오래도록 반려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이라면 어떨까. 아무리 반려동물을 오래 기른다 해도 동물들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어떠한 단서들은 포착할 수는 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저 동물이 어떤 반응을 하는지. 그 반응이 그 동물의 어떤 감정을 나타내는 것인지. 저 동물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저 동물의 상태가 오늘 좋아 보이는지 아니면 나빠 보이는지. 그것은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동물들 역시 주인의 감정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포착하며, 주인의 생활 패턴에 익숙해지고, 특정한 상황에 대한 특정한 반응을 익힌다. 이것은 사실 과학적이라기보다는 감각적으로 표현되는 영역이며 공통의 생활 속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형성되는 경험적인 유대이자 교류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물론 불완전한 이해이다. 그러나 말이 통하는 인간들은 그럼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던가?

농사꾼이 농촌의 삶을 경험하며 계절의 변화와 식물의 생장, 그 외 다양한 맥락으로 구성된 농사의 묘리를 깨닫는 것도 이와 같은 과정일 것이다. 나와 다른 타자 – 그것이 성별이든 성적 취향이든 국적이나 인종이든 – 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과정 역시도 오직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코로나 바이러스조차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그 과정들을 거듭하다 보면 아마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정말 인간인가? 인간의 권리라 말하는 모든 것을 나는 실제로 가지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평등한 인간’이라는 번드르르한 테제 아래, 나 역시 사실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유토피아란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의미에서 왔다. 인간과 짐승 사이, 추방으로 완성되는 순수의 유토피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과 짐승의 진실된 운명은 어쩌면 처음부터 나누어진 적이 없었던 것이리라. <모노노케 히메>의 동물신들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제철장의 사람들이 실은 둘 다 짐승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 이 에세이는 일민미술관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국고 보조금을 지원받아 수행한 ‘2021년 사립박물관 미술관 온라인콘텐츠 제작지원 사업’의 결과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