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박물관_ 지적이고, 재미있고, 복잡하고, 슬픈 세계
그가 바스티유적 견고함 속에 은폐시켜 왔다고는 하더라도, 욕망은 그의 작업 도처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최초의 여인인 판도라와 그 감독관인 프로메테우스 사이에서 충돌하는 욕망, 보는 것으로부터 지금만큼도 자신을 독립시킬 수 없었던 시절의 욕망, 들리는 소리들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당당하게 고립시키는 방법을 지금 만큼도 몰랐던 시절의 욕망…우리는 홍수자가 통과해 온 욕망의 회고전 앞에 서 있다.
박물관, 그것은 과거를 다룬다. 본질적으로 회고적이다. 홍수자의 박물관 안에 즐비하게 도열된 죽음의 관조들을 보라. 한때는 살아 있었으며, 부르짖었고, 갈망했던 것들이자, 현재는 그 미묘한 여운만을 담고 있는 흔적들의 배열을. 화려한 육체로 포장되었던 시절의 슬픈 흔적으로서의 두개골들은 지금 한때의 호소와 갈망을 스스로의 내부에 간직한 채 그곳에 있다. 동물들의 절단되고 오그라든 다리들과 가공된 피부들, 그것들은 모두 죽음의 흔적들이며, 작가의 상처받은 반증들이다. 죽을 만큼의 욕망, 그것들은 지금 욕망의 죽음으로 거기에 현존하는가. 과거를 고증하는 만큼 현재를 지시하는 역설적인 시체들로서.
그 과거의 굴레와 현재의 표지들, 그 다양한 것들, 살아있지 못한 것들, 힘겨운 투쟁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구부러진 목발과 청자 없는 언어들 앞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건강하고, 잘 적응하며 입심 좋은 자들의 불구를 떠올리게 된다. 요령 좋게 살아남은 자들의 비애 같은 느낌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의 것 같아 보이는 불확실한 공감과 함께 ‘호모 센티멘탈리스’의 욕망의 미로, 그 끝도 없는 순환에 대해 재조명해보아야 할 것 같은 내적 충동을 느낀다.
티스푼으로 눈물을 재며 우는 여자
들뢰즈에게 욕망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것이었다. 그에게 욕망은 항상 운동하면서 자신을 재형성하는 것, 즉 유동과 항로의 긍정적인 과정이었다. 욕망의 역동성, 탈 중심적이며, 파편화로서의 그 역동성에 의해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는 생산적이고 혁명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홍수자의 욕망은 결핍과 좌절, 억압에 기초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프로이드나 라깡적 의미의 그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작가는 결핍과 충족될 수 없음의 순환 안에서 욕망을 그려낸다. 훔쳐서라도 걸치고 싶었던 아름다움과 사랑에의 욕망과 결핍, 천사에 의해 가슴에 심어진 사랑은 메아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몰아붙이는 에고의 억압, 너무 높이 날다가 태양에 녹아 땅에 떨어진 이카루스(Icarus)의 절망……
이 절망이 작가의 장치 안에서 눈물처럼 순환한다. 그 순환 안에서 욕망은 혁명적이지도 생산적이지도 않으며, 개인적 차원으로부터 한치도 벗어나지도 못한다. 주체의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검열은 이 비극적인 순환으로부터 단 1그램의 욕망도 축낼 수 없다. 이미 그 주체는 이 순환의 어둡고 긴긴 터널이 되어 있고, 그 열병의 바이러스에 면역을 상실한지 오래다. 질량불변의 법칙은 욕망에도 적용된다던가. 한번 생산된 욕망은 결코 스스로 소멸되지 않으며, 누적된 결핍은 항구적으로 신체와 영혼을 순회할 뿐이다. 시작도 종착도 없고, 탈출구도 없는 순환. 결핍은 거의 몽유병적으로 운명에 개입되고, 그 순환은 ‘구조’라는 어두운 신화로 정착된다. 불멸하는 미와 사랑에 대한 욕망이 빗어낸 불가항력의 순환 구조, 그리고 구조는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길들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욕망의 거대한 순환에 볼모로 잡히고, 길들여진 왜소한 인간의 그 키치적 가벼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주체가 자신의 의미의 90퍼센트를 주체의 포기를 종용하는 것을 위해 비워 두는 것.
홍수자는 이제 잠재의 어느 어두운 구석에서 불쑥 솟아오르곤 하던 그 욕망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신을 이탈시킬 수 있게 됐다고 고백한다. 그 끔찍한 순환을 어느 정도는 고장 낼 수 있게 되었다고. 욕망의 그 지독한 순환장치가 어떻게 수리될는지는 그의 다음 작업이 보여줄 것이다.
되새김질 하지 못했던 말들-언어
작가가 욕망으로부터 소외되듯이, 그의 낱말들은 대상으로부터 소외된다. 작가의 욕망이 시지프스적 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듯이, 시니피에로부터 소외된 낱말들은 목젖과 구강 사이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 문장들은 채 발화를 구성하지 못한 미숙아이거나, 어머니- 언어의(욕망의) 최초의 대상은 어머니다-를 상실한 미아와 같은 것들이다. 영원히 대기 중인 외침이며, 반쯤 은밀한 이야기이고, 아직 결정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불확정성의 문장들이다. 이 일관성 없고, 혼란한 독백들은 자의건 타의건, 무책임이건 불가항력이건 소통의 영도를 은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통에 야기된 이 심각한 장애의 조망을 위해 약간의 정신분석 이론과 페미니스트 언어학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흥미 이상으로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 발화의 장애가 단순한 혼란이나 말실수, 혹은 무의식적인 최면상태가 아니라, 발화주체의 의식적 행위에 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 그 장애의 주체가 ‘남성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홍수자는 일상에서조차 남성적 언어와 교환될 수 없는 근원적인 차이를 자신의 언어에서 느낀다고 말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상징이(문화가) 그를 인간이 되게 했기 때문이라는 라깡의 말은 언어 역시 상징적(문화적)질서의 영역 안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라깡적 의미의 상징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법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남근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문화와 사회적 삶은(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언어다) 곧 남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과 동물은 애초에 세계에 의미와 법을 부여하는 남근중심주의적인 상징계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작가가 동물의 두개골 안에 유폐시킨 그 문장들은 그러므로 여성의 그것이 아닐까. 확고하게 굳어진 기존의 모든 형식, 비유, 관념, 개념들에 대해 저항적이며, 그 어떤 메타(남성적) 언어로도 재현될 수 없는 여성만의 문체가 아닐까. 페미니스트 사상가인 엘렌느 식수스(H.Cixous)가 ‘에크리튀르 페미닌'(ecriture feminine)으로 칭한 것의 한 유형으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여성적 글쓰기의 실천은 결코 이론화되거나 완결되거나 약호화될 수 없다. 이것은 여성적 글쓰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여성적 글쓰기는 남근중심적 체계를 규제하는 담론을 언제나 넘어서게 될 것이다. 이 실천은 철학적-이론적 지배에 복종하는 그런 영역이 아닌 곳에서 해옹하고 일어나게 될 것이다.”
홍수자의 작업에 여성성의 흔적이 산재한다는 점에는 부정의 여지가 없다. 가부장적 시학에 억압된 여성의 발화가 있고, 페넬로페로부터 로테에 이르는 사랑과 배신의 서글픈 계보도 엿보인다. 화려한 모피코트와 우아한 저녁식사의 꿈과 가정 안으로의 서글픈 매몰이 있고, 꽃무늬와 깃털의 장식취향도 있다. <순간을 옷 입기>1996) 가부키 밑으로 관능을 감추었던 꼬마코(소설 ‘설국’의 여자 주인공) 와 열정을 향한 마농의 흔적도 거기에 잠재되어 있다. 그렇더라도 그의 세계에 여성성의 사유가 깃들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그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일상적 체험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만을 확인하자는 것도 아니며, 질서에 대한 전복으로서의 여성성으로만 독해하자는 것도 아니다. 홍수자의 작업은 구체적인 모티브로부터 출발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고 있으며, 예컨대 세계는 여성성을 타락시키기 위한 남성의 저속한 유희라는 식의 조야한 페미니스트 음모론과는 더 더욱 거리가 멀다. 작가는 단지 모델도 복제도 아니며, 재현될 수도 없는 존재, 이름 짓기와 이데올로기-작가 자신이 종종 세계의 게임의 룰이라고 설명하는-의 바깥에 남아 있음으로써 기존의 형상화와 사유화의 오류를 더 잘 지적해낼 수 있는 곳으로 자신의 경험과 언어를 재위치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불확정성을 소유하게 되는 그의 문장들은 오히려 영원히 우리를 감싸는 일련의 불확정성을 지시함으로써 세계를 드러내는 것으로까지 나아가는 하나의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내가 보기에 발화 직전의 그 불안스러운 망설임으로 홍수자가 더 본질에 접근해가고 있다는 인상은 사실처럼 보인다.
아마도, 쿤데라라면 “여성이 남성의 미래가 되던가 그렇지 않으면 끝장이 나든가 둘 중 하나일 텐데, 왜냐하면 오직 여성만이 그 무엇도 해명하지 못할 희망을 간직할 수 있으며, 여성들이 아니라면, 이미 오래 전에 믿지 않게 되었을 그 미래 속으로 우리를 초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뛰어난 묘사를 이 작품 앞에 헌정하지 않았을까.
산문적이라는 것
욕망의 박물관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홍수자의 배열 방식은 산문적이다. 그의 수집품들은 각각 별개의 시원을 지니면서도, 충분히 뒤섞이고 중첩돼있다. 어떤 것들은 시간적으로 과거에 속해 있으며, 다른 것들은 현재의 윤곽을 그린다. 어떤 것들은 보다 직접적인 체험과 관련 있으며, 다른 것들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시적 상상력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기억과 현재, 신화와 은유와 현실, 시와 사상, 에세이와 일기, 그리고 욕망과 신앙이 끊임없이 유동하고 교환되고 있는 것이다. 홍수자는 자신의 세계가 지나치게 산문적이라는 생각이 자신의 엄지발가락을 꼬게 하는 것들 중의 하나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산문적이라니, 우리가 부당하게 ‘산문적’이라고 가정한 그것은, 사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소한 양상들 속으로까지 침투해서 그것들에 은밀하게 삼투되어 있는 세계의 배후를 읽어내려는 반범주적이고, 반폐쇄적이며 고독한 생활습관이 아니던가. 모든 인간 동지들의 영원한 지평이자, 시간과 공간에 대해 다소는 비극적으로 관망해낼 수 있는 태도며, 가장 심원한 질서를 태연하게 포착 해낼 수 있는 길이 아니던가.
문제는 산문적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있다. 더 이상 신화와 상징. 상상력과 종교가 아니라 기술과 이데올로기가 더 잘 세계를 규정하는 시대, 모든 산문적 기능을 대중매체에 떠맡기고 있는 분화와 조직화, 전문화의 시대에 있는 것이다. 서로 모방하고, 교환하고, 차용하면서 실상은 동일한 생각을 확인하는 것인 사상과 이성이 더 이상 경탄하거나 숙고하거나 꿈꿀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모든 것들의 공통 체험화, 특별히 그 삶만의 특성의 부재, 화자와 청자 사이의 차이의 결여,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산문적인 태도에 종지부를 찍고 있다는 것이 정말 문제인 것이다.
동물-인형_은폐와 누설의 이마올로기(imaolgie)
차기는 커녕 건드리기만 해도 낑낑대는 강아지(1995). 실낱을 통해 그 강아지와 서로를 소통하는 원 주인. 거울 앞에서 자신의 수상쩍은 진실을 확인 중인 여우(<방심의 순간>1996). 물론, 부분은 더 이상 상처를 받아들일 수 없는 두개골이거나, 고통의 느낌조차 박탈당한 절단된 발목들이며 모형이나 장난감이긴 하다. 그렇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그 1킬로그램 미만의 것들, 고작해야 초라한 껍데기들, 때로는 화려하고 위선적이기도 한 그것들 안에서 작가의 영혼은 오히려 팽창하는 것처럼 보인다. 홍수자 이상으로 그리고 소와 말이며, 양이나 사슴이상으로.
이들은 작가가 우리들의 수상쩍은 원탁에 가담시킨 논객들이다. 자신을 닮은 성대와 발언권을 부여하고, 우리의 권리 장전에 이름을 올린 초대객 들이다. 작가는 그들을 연민하면서 그들의 시선으로 자신을 향한 연민을 스케치한다. 작가는 그들을 통해 세계를 보지만, 정작 세계를 보는 것은 그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때로 자신들의 탄생 배경을 깨끗이 망각한다. 심미적 대상이자, 심미 자체이며 노리개이자 배반자인 셈이다. 이를테면, 마틴 발저(M. Walser)가 말한 ‘인형’과 같은 존재들이랄까, 아이의 손에 쥐어진 인형, 즉 그 인형을 통해 그것이 없으면 말할 수 없는 문장들을 말하게 하는 아이의 인형, 그것을 통해 비로소 거리낌없이 말할 용기를 갖게 되고, 흥이 돋는 아이의 인형.
아이의 인형처럼, 작가는 이 동물들로 비로소 자신이 겪은 것에 대해 대꾸하거나 소화하고, 묘사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작가의 현실적 체험에 인류학적인 진폭을 부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화되지 않은 체험을 묘사하는 가능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체험의 대변인이자 배심원이고, 가장 열렬한 팬이자 무심한 구경꾼으로 거기에 초대되어 있는 것이다.
변질이 아니고서 라면,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 그러므로 홍수자의 동물들은 자신의 인생이 정리되면서 변조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타자의 개입이며, 자신의 주관적 고백과 사적 영역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식상한 전기의 형태나 무례한 저널리즘으로부터 변별시키는 방법론이기도 한 것이다.
작가의 경우에도, 각각의 작업들은 작가의 사생활의 전기적 등가물이 아니다. 예컨대, 동물들의 절단된 발들은 단지 홍수자의 사적 거울로서만 거기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각자의 그룬드(Grund, ‘동기로서의 이성’이라는 뜻의 독일어)를 가지고 거기에 있는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 혹은 수치심 앞에서 어김없이 꼬이고 오그라드는 작가의 엄지발가락처럼 은폐와 누설의 변증법적 가능성이기도 하다. 바로 이와 같은 엇갈림과 불일치의 대위법을 통해 홍수자는 더 잘 자신의 인생과 대화하고, 더 잘 자신의 체험을 묘사해내고 있는 것이다.
심상용 / 미술사학박사, 미술평론가
참여작가
홍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