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비극을 넘어서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는 육백만 명에 이르는 유태인들을 단지 인종적 편견 하나만으로 가스실에서 처형했다.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을 이틀 앞둔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일제는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이는 무고한 식민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제암리•강서•사천•밀양•맹산•정주•남원 등지에서 일본 헌병들은 무차별한 총격을 가하는가 하면 총검을 휘두르고 건물에 불을 질러 수많은 양민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1923년 일본의 간토•시즈오카•야마나시 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자 야마모토 내각은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혀 동요하던 국민들의 적개심을 재일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에게 전가하여 수많은 한국인들의 학살을 방주 조장하였다. 한국인에 대한 학살의 규모는 이천 명으로부터 육 천명에 이른다는 설이 있으나 여전히 정확한 통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일본군대에 저항하는 중국 군을 인정에서 몰아낸 후 수십 만명의 난징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해방 이후 혼란스런 상정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제주 4.3봉기가 일어나자 토벌대는 유격대는 물론 민간인에게까지 잔혹한 토벌작전을 펼쳐 토벌대의 발표만으로도 폭도 약 8천명, 3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들이 살상되었다고 한다. 6.25전쟁 동안 거창에서는 육백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공비토벌을 위해 파견된 군대의 기관총 난사로 집단학살 된 후 휘발유에 태워졌다. 전쟁은 수많은 마을을 고통과 비참 속으로 내몰아갔다. 1980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던 광주시민들을 향해 계엄군이 발포하자 시민 군들은 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전남도청을 마지막으로 무력진압 되었으나 이 항쟁 동안 사망한 시민들의 수는 여전히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인간들은 이성의 이름 아래 문명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폭력은 문명의 시대에도 여전히 야만성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도 세계는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에 의해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신음, 한숨이 끊이지 않고 있다.
죽음의 풍경들
최근 미술의 흐름으로 보면 이성의 권력에 의해 억압받아왔던 신체가 자아정체성의 표현을 위한 매체로서, 존재를 규명하는 대상으로서 주목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에서 고전적 미의 원리에 바탕을 둔 신체를 발견할 수 없다. 심지어 신체는 유기적 구성체로서가 아니라 기관을 상실한 물질로서 해체되는가 하면 기계와 같은 것에 의해 탈 신체화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우주의 축소판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비례를 지닌 미적 대상으로서의 신체에 대한 고전적 관념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신화가 되어버렸다. 파편화 되고, 사물화 되어버린 신체가 불러일으키는 쓸쓸한 죽음의 풍경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믿음조차 과거지사로 만들어놓고 있다. 만물의 영장이자 고귀한 지배지로서 인간이 누려왔던 지위에 대한 우상파괴적 공격은 신체에 대한 학대를 통해 신체를 감싸고 있는 옷과 피부를 벗겨내고,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성을 노출시킴으로써 강화된다.
변조와 합성 절단과 폐기, 방치 그 밖의 신체에 가해지는 온갖 종류의 시각적 테러와 린치는 신체를 욕망의 공장이자 본능에 반응하는 단세포들이 투쟁하는 장이며 영혼이 거세된 단백질 합성체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듯하다. 신체의 즉물성과 비천함을 폭로하는 이런 종류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또 하나의 인간의 부재를 확인하게 된다. 그 부재의 황무지 속으로 인간이 아닌 괴물이나 인간의 형상을 한 기계들이 틈입하여 인간의 교만과 나약함을 증명하듯 인본주의를 조롱하고 그 시효소멸을 선언한다. 이 신체의 죽음을 알리는 현대미술의 행렬이 드러내는 세기말적 징후 속에서 박성태의 ‘실재했던(하는) 죽음’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그가 실제 인물을 떠낸 수많은 인간의 형상들은 거의 죽어 널브러진 사지가 절단되거나 부서진 파편으로 제시된다. 근육의 에너지가 정동을 멈춰버린 축 늘어져 대지 위에 내던져진 이 인체들은 죽음의 속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실재하는 인간을 라이프 캐스팅할 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모두 눈을 감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을 떠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통상 그것을 데드 마스크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리하여 이 마스크들은 활동성을 박탈당한 정지의 지속이란 특징을 띠게 된다. 이천이백 여 개에 이르는 마스크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박성태의 작품을 보면 우선 그 엄청난 수량이 이들 마스크가 야기하는 심리적 충격을 압도함을 느낄 수 있다.
고화도로 구워진 것에 다시 그을음을 입힌 이 마스크들은 그야말로 폐허를, 재앙의 참혹함을 증명하려는 듯 침묵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소리 없이 절규하고 함성을 내지르고 있다. 수많은 양에 의해 익명적 존재가 되어버린 마스크들이 환기하는 이러한 분위기는 전시장 한 가운데 재현된 논바닥 위에 방치된 듯한 전신상과의 관계에 의해 이 작가가 역사적 사건에 대해 발언하고 싶어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즉 그가 꾸리고 있는 이 죽음의 드라마 보편적 죽음 혹은 개체의 소멸에 대한 관념의 시각화가 아닌 구체적 사건 더 나아가 폭력에 의해 자행된 집단학살과 같은 비극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정당한 복원을 위한 증언
동유화란 특이한 기법으로 인간의 실존문제를 평면 위에 구현하고자 했던 박성태는 평면으로서는 도저히 가슴 속에 맺힌 바를 다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달으면서 입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인체를 주형하면서 바야흐로 20대에 경험했던 광주민주항쟁을 조형예술을 통해 드러낼 수 있으리라 확신하게 된다. 여기 참혹하게 배열된 2천 2백여 개의 얼굴과 관속에 안치된 주검들, 여기저기 놓여진 뒤 절단된 신자들은 바로 학살달관 희생자들의 초상이다. 그것이 이 전시장을 을씨년스런 폐허로서가 아니라 숭고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과잉된 난폭성을 떠올리게 만드는 마조키즘이나 새디즘의 그림자가 엄습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정당한 복원을 위한 일종의 현장검증과 같은 것으로서의 발굴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작가 자신이 우회적으로 발언해 왔던, 약간의 암시만을 통해 고발해 왔던 광주의 참혹성이 이제 직접적으로 거침없는 표출의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 거대한 비극의 드라마에서 신체는 영혼이 추방된 물질로서의 고기덩어리가 아니라 폭력에 의해 존엄성을 침해 받은 영혼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유예된 진실을 밝혀주기를 요구하는 증거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의 집요한 강박적 집착은 비단 광주민주항쟁의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비명碑銘과도 같은 것에만 국한되고 있지 않다. 그는 인간의 역사 속에 실재했던 수많은 죽음의 파노라마를 이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한다. 미이라를 안치했던 이집트의 목관을 암시하는 석고 틀과 역사적 유물의 발견현장과도 같은 설치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전의, 그 죽음의 공포가 이미 문화의 영역으로 인계돼 버린 유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은폐된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것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이다.
직접적으로는 광주항쟁으로부터 조금 더 소급하자면 6.25 전쟁 중 아군이든 적군이든 군대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설에 이르기까지 그는 폭력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실제로 그의 작업실이 있는 일산의 인근 마을주민 모두가 6.25때 집단화살 당한 비극을 갖고 있는데 지금까지 정확한 피해규모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논바닥에 내던져진 시체들은 이러한 역사적 비극의 규명을 위한 현장발굴과 복원장면을 가상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처절하면서도 절망적인 파멸의 풍경 속에서 인간은 정말 하찮은 존재인 것처럼 죽음의 이미지가 뿜어내는 파토스는 인간이란 얼마나 왜소하고 상처 입기 쉬운 존재인가를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생명은 역시 존엄한 것이며 죽음은 모든 것의 종결이 아니라 또 다른 생명의 출현을 예비하는 일종의 휴지(休止)임을 그는 생성과 소멸의 변증법을 통해 드러낸다. 이를테면 건조과정에 있는 흙 작업을 전시장에 그대로 옮겨 놓음으로써 이 흙이 습도가 낮고 강한 빛이 내리쬐는 전시장 환경에 의해 건조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는 균열이나 덩어리의 절단을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흙이란 재료가 환기하는 생명성과 시간의 흐름에 의해 발생하는 변화 즉, 생성과 응고현상을 죽음과 부활의 메타포로 활용함을 알 수 있다.
그래도 문제는 휴머니즘이다.
현대미술이 휴머니즘을 폐기하여 미술사의 저편으로 강제 추방시켜 버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성태는 그것을 작업의 이유이자 주제로 설정하고 있다. 박성태의 작품이 여전히 휴머니즘에 뿌리내린 것임을 밝혀주는 것이 ‘97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 출품했던 세라믹 직업이다. 제법 큰 접시 위에 어린이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린 다음 그것을 물로 채워놓은 이 작품들은 그가 자원봉사하고 있는 홀트아동복지재단에서 만난 입양아들을 표현한 것이다. 게 중에는 이른바 정신박약아나 지체부자유아 등의 신체적 결함이나 정신적 결핍을 지닌 어린이들의 모습도 나타나고 있는데 부모로부터 받아야 할 보호와 양육의 권리를 박탈당해버린 이들을 그림으로써 그는 유기당한 인간의 슬픔과 비참함의 책임이 우리 사회에 있음을 조용하게 말하고 있다. 즉 이들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비록 정상적인 사람의 신체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유폐시킨 우리들의 이기심과 야만성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박성태의 정서 속에는 분노를 녹일 수 있는 보편적 휴머니즘의 관대함, 포용의 여유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 누워있는 희생자들의 죽음은 단순히 죽음의 증명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이겨내는 정의의 승리를 알리는 표지(標識)인 것이다. 그러나 그 정의의 승리를 위해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이상으로 진실은 규명되어야 하며 그 바탕 위에 용서와 화해가 가능함을 그의 작품은 말하고 있다. 미술이 한없이 나약하기만 한 인간의 모습을 폭로하는 가운데서도 박성태는 여전히 미술이 수행하여야 할 사회적 역할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실천은 분노에 찬 선언이거나 주장이 아니라 휴머니즘에 기초한 역사의 정당한 서술이며 복원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전히 휴머니즘이다. 감상적인 동포주의가 아닌 삶의 건강성을 담보한 인간애야말로 그의 작품을 힘있게 이끌어가는 동력인 것이다.
최태만 / 미술평론가
참여작가
박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