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힘, 윤동천의 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검으로 일어난 자는 검으로 망한다.”
권력, 그러니까 사회의 가장 가시적인 힘에 관한 유명한 언급이다. 역사는 폭력 위에 서있다. 힘이 움직이는 곳에는 무수한 피흘림이 있다. 그러나 권력은 이렇듯 정치적 집단의 패권적 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수면 위의 빙산에 불과하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권력은 매우 광범위하며 섬세하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구성원의 미시적인 삶에까지 작용하는 그물망이다.
권력은 모든 이의 일상 속에서 말한다. 이렇게 살아라, 저것을 선택하라, 이것을 즐겨라, 저것에 반응하라,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자의 명령을 부지불식간 따른다. 우리는 그렇게 살라고 교육받았고 훈련 받았다. 교육체계와 지식체계는 권력체계의 기능을 떠받치는 중요한 기둥이다. 한 시대의 지식체계는 한 시대의 권력체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세상이 어떠 어떠하게 구성돼 있다고 말하는 지식체계의 한계를 벗어나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지식체계는 결코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특정한 이해 내지는 의도와 관련해 걸러지고 맺어지고 조직된 것이다 이에 기반해 권력은 전개된다. 지식의 그물망은 이렇듯 같은 씨줄과 날줄로 엮이어 있는 것이다.
윤동천의 최근 작업은 이 그물망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려는 사유행위이다.
윤동천은 이번 전시에 ‘힘’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출품했다. 그는 애당초 막연히 ‘작품에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힘에 대해 접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접근하는 와중에 그는 우리 삶이 만연해 있는 힘과 힘의 종류, 의미 따위에 대해 보다 깊이 천착하게 됐다. 하나의 힘을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힘들과의 복잡한 역학관계 속에서 그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이므로, 이는 결국 우리 사회에 내제한 힘의 그물망, 곧 권력의 그물망을 조망함으로써 비로소 그 사유의 진전이 가능하다고 인식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윤동천은 일단 그가 일상적으로 접한 다양한 힘의 모습에 주목했다. 이를테면 ‘인고의 나날’ 연작의 경우 국제통화기금 체제가 우리 사회에 가하는 압력을 의식해 만든 작품이다. IMF라는 영어 필기체 글자를 각각 하나씩 종이 위에 내리누름으로써 한국인 일반이 당하는 심리적 압박감을 표현했다. ‘사랑의 매’는 학교 학생출석부를 바닥에 놓고 벽에 30cm짜리 학습용 자에서 몽둥이까지 다양한 매를 배열한 작품이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기존의 체제에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 교육 시스템을 다소간 비판적 시각으로 본 작품이라 하겠다.
그런가 하면 6개의 사물을 늘어놓은 ‘혁명의 도구들’ 연작은 우리의 삶을, 나아가 가치관을, 크게 바꿔놓은 특별한 사물들에 대한 성찰이다. 무력에 의한 혁명을 가능하게 한 총에서부터 ‘식량 혁명’에 일조한 라면, ‘정보 혁명’을 이끈 컴퓨터의 마우스 등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느 순간 우리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준 사물들을 윤동천은 담채의 드로잉으로 표현했다. 이렇듯 우리 주위에는 무수한 혁명의 유산, 권력의 유산, 힘의 유산이 흩뿌려져 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크게 의식하지 않아서 그럴 뿐 그것들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좌표들이다.
그 흩뿌려져 있는 힘의 보다 미세한 떨림을 무척 재치 있게 표현한 작품이 그가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판매용 물품들이다. 기왕의 미술품들이 워낙 비싸 관객들이 사가지 않는 현실에 대한 하나의 풍자로 윤동천은 매우 싼 미술작품들을 제작했다. 관객들을 대상으로 판매되는 이 물품들은 하나의 소비재이자 미술품이라는 미묘한 좌표 위에서 평소에는 현실 뒤 안에 숨어있는 각양각색의 힘에 대한 연상을 끄집어낸다, 1200원짜리 저금통에는 ‘비자금’이라는 단어가 프린트돼 있고, 600원짜리 연필깍기 칼에는 ‘단 칼’이라는 글자가 인쇄돼 있다. 500원짜리 때밀이 수건에는 ‘팍팍’이라는 글자가, 2800원짜리 재떨이에는 ‘No.3’라는 글자가 각각 쓰여 있다. 또 우산에는 다소 감상적인 문구인 ‘그래도 태양은 다시 뜬다’가 프린트 돼 있다. 힘의 그물망 속에서는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도 단순히 사물이나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그 모두는 다양한 상징과 기호로서 우리가 추구하는, 혹은 기피하는 현실로 다가와 우리의 삶과 엮인다. 우리는 이들 힘들의 충돌 속에서 그 파장과 공명의 반경을 우리 생존의 처로 삼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나름대로 마누라(혹은 애아빠) 몰래 ‘비자금’을 챙기고, 때로 주위 사람들에게 인심 ‘팍팍’ 쓰며, 경쟁자들일랑 ‘단칼’에 넘어뜨리려 무진 애를 쓴다. 그래도 살아가는 자리는 늘 ‘No.3’이고, 그런 탓에 귀가길 술자리에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그래도 태양은 다시 뜬다.’고 되뇌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힘의 그물망은 그 자체가 하나의 힘일 뿐 아니라, 그 그물망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힘을 추구하게 만드는 그물망이다. 힘을 지향함으로써 생존하게끔 만드는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힘의 그물망이 촘촘히 짜인 사회일수록 개인들의 힘을 지향하는 성향은 더욱 강해진다. 하지만 개인은 어디까지나 권력의 객체이다.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심지어 권력자라는 특수한 개인도 궁극적으로는 권력의 객체일 뿐이다. 그는 단지 권력의 구조와 문법 속에서 권력을 실행할 뿐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권력을 창출하지는 않는다. 권력은 체계이다. 권력은 그물망이다. 권력은 사회의 이해와 의도들, 입장들이 교육체계, 혹은 이념체계, 지식체계와 어우러져 빚어진, 강력한 지배의 장이다. 이와 같은 장에서 개인들은 힘을 추구하지만 결국 그 힘의 주체로 서지 못하고 객체로 떨어지고 마는 까닭에 그 현실적 비극이 있다. ‘강원도의 힘’, ‘파워세일’, ‘탱크주의’, ‘아저씨, 이 차 경차 맞아요?’등 갈수록 힘과 관련한 용어들이 운위되고 이야기되는 사회, 그만큼 개인들은 힘을 상실하고 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 체제 아래 들어간 우리 사회는 더욱 더 강력한 힘을 갈구하고 있다. 태극기가 다시 펄럭이면서 애국심이 고취되고 잇고, 서울올림픽이 상기되면서 민족의 저력이 이야기되고 있다. 사회가 흔들리니 그만큼 힘에 대한 의식이 인플레 된다. 윤동천의 작업은 특히 이 지점에서 세심한 눈길을 던지고 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전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였고 힘의 주체였으나,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래 세계에 지배-피지배 이분법을 낳았고 나아가 인간 스스로 지배의 대상이 되는 비극을 낳았다. 그 전개과정이 권력의 그물망 자체가 심화돼온 과정이라고 할 때 현대사회의 치유는 인간의 ‘자연 지내의 역사’ 까지도 되짚어보는 지난한 과정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저 보다 강력한 힘, 보다 강력한 권력, 보다 강력한 지배만을 원한다. 대중요법으로 탈출하기는 원하는 것이다. 그에 비례해 인간의 조건은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모순을 해결한 방법은 없을까?
윤동천은 당장 이 같은 모순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 나름대로 하나의 희망을 피력한다. 그것은 ‘예술의 힘’에 대한 믿음이다. 예술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지배-피지배 관계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예술의 힘은 인간을 억누르는 권력 일반에 대한 반성으로 기능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기능해온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윤동천은 단 한 개의 조명이 내리쬐는 어두운 방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인 책 형태의 브론즈 작품을 설치했다. 이번 전시의 결론과 같은 작품이다. ‘나는 그림의 ‘힘’을 믿는다. 그것은 비록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작용하지만 ‘생각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 중의 하나이다.’‘힘의 진실’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전시가 아닐 수 없다.
이주헌 / 미술평론가
참여작가
윤동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