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서구미술의 도입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의 역사는 20세기 초 서구문명의 도입과 그 출발을 같이 한다. 이전의 미술은 시대나 생활상의 단면과 일정한 관계를 맺으며 일상 속에 녹아 들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화가 정선이나 김홍도가 중국회화의 형식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수의 실경(實景)을 포착하여 한국 고유의 양식을 창출해 낸 것이나, 조선시대 말기 한국적 특성이 숨쉬는 풍속화나 민화 등이 일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발전해온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후 한국미술문화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일본에 유학한 젊은 미술학도들에 의해 유입된 서구미술이 그것이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재료나 기법, 조형개념의 습득은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통과의례였던 동시에 발전된 미술문화를 형성하는 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가 일제강점 하에 식민사관이 주입되던 시기였음을 고려한다면, 당시 서구미술의 도입은 일방적 전수이자 불균형한 수용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서구사회는 새로운 시민정신이 탄생되는 과정 속에서 성숙되어 왔고, 이에 따른 미술문화의 발전을 이루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근대미술의 시작으로 미술의 자유화가 시도되었고, 화가들은 기존의 미술이 가진 권위와 전통에 도전하면서 그들의 캔버스에 무엇을 그려야 하는 지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미술이 무엇인가에 대해 즉 미술개념 자체에 대해 갈등이 초래되었으며 이러한 여파는 입체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현대미술사를 장식하는 여러 사조들의 확산과 전개를 낳게 되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서구미술의 새로운 재료와 다양한 사조가 일본을 거쳐 유입되는 한계를 지니면서 개념상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근대미술 도입기부터 싹터 온 혼란스러움은 이어진 전쟁기와 경제우선정책시대를 맞이하면서 더욱 가중되었고, 결국 대중으로 하여금 현대미술을 어렵고 난해하며 경제적 생산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의 책임감 없는 행위라는 인식을 주기에 이르렀다. 일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던 이전의 미술문화가 현대화되는 과정에서도 유지되었더라면 하는 바램은 한국현대미술의 전개에서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동아일보의 미술활동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문, 잡지 등 대중인쇄매체의 출현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는 한 개인에 머물던 관심사를 사회전반으로 확대시킴을 의미했고, 그 위력은 당시 신문이 벌였던 ‘물산장려운동’이나 ‘한글보급운동’에서 역력히 확인할 수 있다. 그 선도적 주자가 바로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는 1920년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함’•‘민주주의를 지지함’•‘문화주의를 제창함’을 3대 사시(社是)로 내세우며 창간되었다. 8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표어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문화주의의 제창’은 근대문명 도입기의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신문 본연의 기능과 맞물리면서 한국예술문화의 확립과 독립성의 추구를 가능케 하였다. 특히 미술이 현대화되는 과정에서 미술의 일상화를 향한 열의와 지지는 주목할 만한 것이다.
동아일보의 미술활동은 동아일보 지면(紙面)의 지속적 배려와 각종 미술행사로 병행되었다. 동아일보가 창간 초기부터 미술에 대한 지면할애가 대단히 컸다는 것은 현재에 비해 미술전람회나 여타문화활동이 현저히 적었음을 감안하더라도 문화주의에 대한 동아일보의 의지가 얼마나 뚜렷했는지 알 수 있는 점이다. 최열의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에 실린 1920년부터 1945년까지 동아일보의 미술기사를 살펴보면, 동아일보는 미술사적 행사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미술이론형성에 대하여 적극적 논의가 이루어 질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서화의 발전과 연구, 후진교육을 목적으로 형성된 <서화협회>의 전람회에 대한 격려의 사설, <조선미술전람회>에 대한 비평, 작가와 작품보도, 그리고 이종우 귀국전,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 전에 관한 보도 등을 그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다.
한편 동아일보는 미술전람회를 주최하기도 하였다. 1927년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를 대규모로 개최한 것을 비롯하여 국내 최초로 파리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이종우 개인전(1928)> 동경미술학교 동문들의 <동미회전(1930)>, <청전•청정 소품백폭전(1935)> 등의 개최는 이후 <동아공예대전(1963-현재)>, <원로 및 작고작가 회고전(1970-현재)>, <동아미술제(1978-현재)> 등 다양한 미술행사의 시발점이 될 수 있었다. 동아일보의 이러한 지속적 활동은 한국미술문화의 정체성 확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미술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언론의 사회적 역할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광화문 139번지
‘광화문 139번지_신문과 미술 1920-2000’은 바로 80년 동안 동아일보가 벌인 다양한 미술활동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전시제목에 언급된 ‘광화문 139번지’는 현재 일민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는 건물을 의미하고 있는데-실제로는 세종로 139번지이다-이는 1926년 동아일보 사옥으로 지어진 이래 광화문의 상징적 건물을 뜻하는 장소성을 명시하고 있다. 1920-2000은 창간이래 현재까지 80년이라는 시간성을 명시하고 있으며, 광화문 139번지의 장소성과 함께 이 전시가 가지는 역사성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 전시의 부제는 광화문139번지에서 80년간 소장한 미술품은 곧 동아일보 미술활동의 역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는 ‘제1부-시대상과 미술’과 ‘제2부-신문 속의 미술’로 나뉜다. 제1부에서는 동아일보가 펼쳐 온 일련의 미술행사와 지면을 통해 선보였던 700여 점의 소장미술품들 중에서 190여 점을 시기별로 선별하였다. 즉 1920-40년대 근대미술 도입기, 1940-1960년대 해방과 정치적 혼란에 따른 모색기, 1960년대 이후 현대미술의 정착기로 크게 나누었으며, 주로 회고전 개최 작가의 작품과 <신동아>와 <여성동아>의 표지화로 제작되었던 작품, 그리고 신년휘호, 창간 기념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작가들로는 이도영, 고희동, 허백련, 이종우, 노수현, 김은호, 이상범, 변관식, 도상봉을 비롯하여 장우성, 김기창, 천경자, 유영국, 장욱진, 권옥연을 거쳐 박서보, 윤명로, 이종상, 송수남에 이르기까지 근•현대미술의 대표적 작가 100여 명을 총망라하고 있어 한국미술의 시기별 경향이나 발자취를 한 눈에 살펴볼 수가 있다. 특별히 전시장 일부에 1930년대, 1950년대, 1970년대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공간을 마련하여 전시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더하고자 하였다.
제2부는 신문에 실렸던 연재소설 삽화, 연재기획물 삽화, 그리고 만화와 만평을 중심으로 신문 속 미술을 살펴보는 섹션이다. 1부의 작품에 비해 대중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는 2부에서는 하루하루 발행되는 신문의 특성상 마감 시한에 제약을 받으며 그려진 삽화, 만화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신문미술의 성격, 즉 순발력 있는 아이디어의 참신함, 속도감 있는 붓놀림의 경쾌함, 시사성과 일상성을 담은 주제 등 매스 미디어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이 섹션에서 처음 공개되는 이상범과 천경자의 소설삽화 원본은 대가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또한 신문광고가 신문미술의 상업적 결과물임을 감안하여 광고문안과 오리지널 기물을 함께 보여주는 공간을 별도로 마련함으로써 순수미술영역을 확대시킨 새로운 전시 방식을 시도하게 된다.
신문미술의 의의
동아일보사의 소장품은 유수한 컬렉션과 같은 화려함이나 웅장함을 자랑하는 또는 유명작가의 대표작들로 구성된 컬렉션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나름대로 80년이라는 신문의 역사가 펼친 대중을 향한 미술문화보급의 결과로 이루어진 소장품이라는 점에서 결코 그 무게가 가볍지만은 않다고 하겠다. 이제 우리의 미술문화는 사진과 영상은 물론 컴퓨터그래픽, 테크놀로지의 도입으로 또 다른 변화의 전환점에 직면하고 있으며, 신문미술도 점차 추세에 대응해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시대에도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것이 유효하고 가치가 있다는 동시대의 전반적인 동의를 감안한다면, 기존형태의 신문미술도 지속되어야 할 의미는 오히려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20년 후 ‘동아일보사 소장 미술품 100년 전’이 기대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일민미술관 학예연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