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마음의 흔들림, 겹침, 사이…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가 김호득은 최근 몇 년 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던 이런 화두를 슬며시 건네 왔다, 한치의 떨림이나 망설임 없이, 그리고 오랫동안 숙고했던 그 흔적이 역력하게, 선생의 목소리는 그저 나지막하게 다가오는 봄바람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기만 했다. 몇몇 떠오르는 단상을 힘주어 피력하기도 하고, 생기에 찬 의욕을 보이기도 하다가 다시 긴 상념에 잠기는 모습을 보면서 전시의 부재로 내놓은 ‘흔들림, 문득’이란 말을 못내 실감했고, 이번 전시의 모양새랄까 아니면 태도 같은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바람에서 흔들림까지… 그리고 어쩌면 ‘지금, 여기’(혹은 ‘앞으로, 거기’) 앉아 있는 작가에게서 엿볼 수 있는 어떤 느낌까지도.
‘파격과 실험’, ‘기존의 조형질서에 대한 모반이자 거부의 몸짓’ 등, 작가 김호득 하면 떠오르는 숱한 수사의 한 자락들은 대강 이런 어구들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가장 현대화된 한국화, 한국화의 새로운 모색이니 하는 말로 그의 화단에서의 위치가 밑그림으로 그려진다. 비교적 초기라 할 수 있는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반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현란하게 난무하는 붓의 흔적과 농묵으로 일관한 형태들은 기존의 수묵 산수화에 대한 거센 부정과 필묵의 왕성한 실험이라 할 수 있다. 형식에 구애 받지 않은 화면의 즉흥성과 긴장감은 전통 한국화에 대한 고민과 실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결과들이기도 했고, 작가의 이후의 궤적을 얼마간은 예비할 수 있는 전조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김호득의 시선은 자연으로 향하게 되는데 산, 계곡, 들, 물, 꽃, 폭포 등의 산수화는 그가 한국화의 전통과 본격적으로 대면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방식은 언제나 그렇듯 선현들과 함께 하면서 그를 넘어서는, 부정의 방식을 통해서였다. 작품들은 기존의 화격畵格을 넘어, 마모된 생명력을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이를 위해 그가 시도한 것은 화선지 대신 광목이나 하드보드지를 쓴다든가, 중필이 없는 편필로서 골법적 묘사를 아예 포기한다거나 하는 것이었다. 거친 숨결을 그대로 분출함으로써 생명력의 기氣, 이른바 기운생동氣韻生動을 화면에 가득 드러내기 위해서는 기존의 재료상의 제약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고, 여기에 그것이 얼마나 사의 寫意를 드러내고, 사실寫實에 가까운가 하는 구분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김호득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90년대에 들어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폭포와 계곡, 바위와 산, 들을 대상으로 한 이 시기의 그림들은 그 구체적인 형태들을 잃어버리고 필묵의 자취로만 남게 된다. 이 시기의 작가를 구별 짓게 만든 ‘전통화법과 필묵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두드러지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1998년을 기점으로 이런 현대적인 작업이 더욱 가시화 됨을 살펴볼 수기 있다. 필묵의 붓질을 통해 정신을 담아내는 대신, 포장지 위에 검은 안료를 뿌려 손가락으로 문질러 놓는 식의 드로잉을 한다든가, 혹은 옥수수 대궁에 먹을 묻혀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먹물에 담근 흑백의 종이 여러 장을 수직으로 천장에 설치하고 바닥에는 먹물이 스며든 종이를 구겨서 설치하는 식의 작업이 그것이다. 사실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작가의 관심 또한 자연을 대상으로 한 호흡, 그 긴 융합의 과정을 토해내고 표현하는 데서 벗어나 자연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람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화폭 위에 필묵의 갖가지 운법으로 가시화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일까? 전시 공간 속의 백과 흑이 맞닿아 있는 종이의 흔들거림을 통해, 그리고 관람객들과의 교감을 유도해내는 설치를 통해, 열림과 닫힘, 양과 음, 채움과 비움의 얇은 떨림과 미동으로 대지 속에 이는 바람을 설치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김호득의 수묵 설치 작업은 공간의 실험이라는 서구의 방식과 다르게 동양적 이념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달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그에게 있어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호흡하고 있는 존재의 거처 혹은 그 움직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3-4년간의 노정의 끝에 그가 체득한 것은 그린다는 것에 대한 단순함, 그러나 가장 원초적인 물음이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줄 점찍기의 행위이다. 바람에서 흔들림으로 이어지는 여정의 끝에 마주하게 된, 점을 찍는다는 것 그리고 화폭 위에 그 점찍기의 행위가 반복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무수히 반복되는 점찍기의 행위는 어떤 면에서는 화폭을 메워 가는 그리기의 행위이자, 그 점들이 중첩됨으로써 화폭이 희미해져 가는 지우기의 과정을 수반한다. 서양화든 한국화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라 할 수 있는 ‘점찍기’를 통해 어쩌면 작가는 그간의 흔들림을 잠시 동안 정지시킨다. 아니 정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고민의 과정을, 매 순간 자신의 행위를 공간화 혹은 기사화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동안 작가가 ‘그린다는 것’을 통해 고민해왔던 많은 문제들과 그 떨림의 과정들을 흔적화시키는 것과도 일치한다.
이번 김호득 전은 단순히 한국화의 새로운 현재형에 대한 모색으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그리게 하는 것(혹은 ‘하게’하는 것)에 대한 회화의 오래된, 그러나 구태의연하지 않은 질문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그리기’의 문제가 동서양을 가르는 이항대립적인 문제들을 벗어나, 그것을 가로지름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보여 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전시는 한국화가가 아닌 작가 김호득이 던지는 ‘회화, 그린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질문들이며 그 대답들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긴 세월 동안 호흡하면서 고민한, 그리고 ‘지금, 여기’작가의 고민과 그리기에 대한 사유가 담겨 있는 ‘점-찍기’혹은 ‘점-획의 그리기와 겹침은 늘 부단한 변환과 생성의 계기 속에 자신을 던져왔던 작가 김호득의 이후의 궤적을 더 한층 궁금하게 할 그런 모양새를 가지고 전개되리라 본다. 그렇기에 <흔들림, 문득>, <흔들림, 문득-사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작가의 이후의 모습을 잠시 지연, 지속하게 하는 이번 김호득 전은 진행 중에 있는 어떤 순간, 흔적을 담아내기 위한 자리가 될 것이다.
일민미술관 학예연구팀
참여작가
김호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