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의 문을 다시 열며
일민미술관이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다시 문을 엽니다.
일민미술관 건물은 1926년 세워져 몇 차례의 증축과 개축을 거쳤습니다. 공간 확장을 위해 이루어졌던 과거의 공사들과는 달리, 지난 1년 동안의 리노베이션은 옛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과거가 내재된 미래’를 만들어 내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미술관 문을 다시 열면서 갖는 첫 번째 전시로 준비한 <도시에서 쉬다>는 도심에 자리한 일민미술관의 지리적 특성을 살리고 대중과 소통하는 컨템포러리 미술관으로서의 방향성을 염두에 두면서 기획하였습니다. 도시는 현대사회의 대표적 표상입니다. 이번 전시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도시를 우리시대 예술가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도시 일상에 대한 그들의 감성을 어떠한 형식으로 표현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전시에 참여한 8명의 작가들은 오염이나 매연, 인구 과밀, 맹목적인 질주 그리고 고단한 일상으로 인식되는 현대 도시를 긍정적이고 여유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도시의 숨겨진 단면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이 전시에서는 익숙한 것들 속에서도 새로운 발견을 가능케 하는 이 시대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서도 주목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지난 1년간 일민미술관에 대해 염려하고 격려해주신 많은 분들, 리노베이션 공사현장에서 밤낮없이 애쓰셨던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힘든 시기를 함께 지나온 동료들께 이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일민미술관에 대한 여러분들의 애정 어린 충고와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2002.2.20 일민미술관
곤두 선 골목, 바퀴 달린 골목
도시를 처음 본 건 여덟 살 때였다. 그때까지 내가 낳아 자란 시골동네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통틀어 이십여 호 밖에 안되는 박적골이라는 동네에서 산모퉁이를 돌아 이웃마을에 가본 적이야 있었겠지만 하고 사는 형편이나 산천경계가 비슷해서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서울 가기 위해 우리 마을을 떠나 개성시내까지 이십여 리를 걷는 동안 지난 크고 작은 마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건 아무런 인상도 못 받았다는 뜻도 된다. 사람은 다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다.
우리 동네에서 개성에 가려면 거쳐야 하는 고개 중 마지막 고개가 농바위 고개인데 허위단심 가파른 고개 정상에 올랐을 때였다. 눈 앞에 여지껏 가 살아온 세상과는 전혀 딴판의 세상이 펼쳐졌다. 기와집들이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 붙어 있는 사이로 신작로가 곧게 뻗어 있고 거대하고 네모난 흰 돌집들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도시 전체가 은빛으로 정결해 보였는지. 그건 아마도 땅이 사질이고 대부분의 학교나 공공건물들이 화강암으로 지여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훗날 생각해낸 것이다. 거기까지는 숨을 죽이게 황홀했지만 다음 순간 비명을 지르며 엄마 치마꼬리에 매달리고 있었다. 어떤 건물에서 이글이글한 주황빛 화염이 뿜어져 나오는 걸 봤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에 불이 났다는 생각 없이도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그건 그때까지 내가 본 어떤 불과도 닮지 않은 미지의 불이었다. 엄마는 내가 무얼 보고 그렇게 놀랐는지 알고 나자 그건 불길이 아니라 유리창에 지는 해가 비쳐서 그렇게 보인다는 것과 대처에서는 유리로 창문을 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유리로 된 거라고는 시골사람들이 석유를 담아둘 때 쓰는 한 되들이 정종 병이 전부인 나는 창문을 온통 유리로 바른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곧 대문짝보다도 큰 창을 유리로 바른 개성역을 거쳐서 쇠붙이와 유리로 된 기차를 탐으로써 유리창이 얼마나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할머니와 숙모가 배웅을 나왔는데 유리는 기차를 찬 사람과 못 찬 사람을 확실하게 갈라놓으면서 동시에 함께 있게 했다. 기차가 움직이자 할머니도 따라 움직였고 나는 할머니한테로 되돌아가고 싶은 시늉을 했지만 코가 찌부러졌을 뿐 유리를 돌파하지는 못했다. 할머니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리창을 통해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고 나는 곧 내가 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경치에 정신이 팔려 할머니를 잊어버렸다. 유리창에 놀란지 한 시간도 안돼 유리창의 신기한 기능에 완전히 현혹된 것이었다. 서울역에 내리자 나는 또 한번 혼비백산 하고 말았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많을 수가 있는지 그리고 다들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개성역보다 훨씬 규모가 큰 구름다리가 미어질듯했다. 여기서 엄마를 놓치면 생전 못 찾을 것 같았다. 엄마가 보따리를 이고 들고 있어서 걸음이 더딘 것도 답답했다. 서두르는 군중들로부터 우리만 낙오할 것 같아 조마조마한데 엄마의 걸음걸이는 지지부진했다. 개성역까지는 머슴이 지게로 지고 오고 기차까지는 할머니와 숙모가 나누어 들어 준 보따리를 엄마 혼자 감당하려니 벅차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엄마의 서울 살림은 곡식을 비롯한 먹거리의 대부분을 시골집에 의존하고 있었다.
붐비는 구름다리를 어렵게 통과하고 역사를 빠져나오니 너른 마당이 나오고 너른 마당에도 사람들이 백절치듯 모여있었다. 사람들 중에는 지게를 진 사람도 여럿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엄마한테로 모여들었다. 엄마는 그들하고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흥정은 오래 걸렸다. 엄마가 사는 동네가 현저동이라는 소리만 듣고도 그 꼭대기를 어떻게 가느냐고 도망치는 지게꾼도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돈이 있어야 지게꾼도 부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우리집 머슴 호뱅이는 늘 지게를 지고 다니면서 온갖 힘든 일을 다했지만 누가 돈을 주는 것 본 일이 없었다. 엄마가 지게꾼한테 굽실거리고 지게꾼이 엄마를 은근히 얕잡아 보는 것 같은 태도도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어찌 어찌 흥정이 이루어져 양손이 자유스러워진 엄마는 내 손을 꽉 잡고 여기서 어마 잃어버리면 큰일난다고 겁을 주었다. 거리를 바쁘게 오가는 많은 사람과 유리창이 달린 네모난 건물도 신기했지만 머리에 더듬이 같은 걸 달고 길 한가운데로 난 철길을 달리는 전차가 가장 신기했다. 꽤 많이 걸어 큰 네거리를 지나고 얼마 안가서 전차 길도 돌아서 가야 하는 큰 문을 만났다. 지금은 길 옆으로 물러나 잘 보이지도 않는 독립문이 그때는 왜 그렇게 어마어마해 보였는지, 고개가 아플 정도로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그렇게 큰 문이 누구 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이 아니라 그냥 한길 한가운데 버티고 서있는 문이라는 것도 이상했다. 독립문을 지나자 왼쪽으로 벽돌로 된 시뻘건 담장이 나타났다. 그 안의 건물들의 지붕도 잘 안보일 정도로 높은 담장이 시골 우리 동네만큼 넓은 지역을 휘돌고 있었다. 뭐하는 데냐고 물어봐도 엄마는 고개를 외로 꼬고 아무 말도 안 했다. 나중에야 그게 감옥소라는 걸 알았다. 지금의 교도소를 그때는 다들 그렇게 불렀다. 엄마가 사는 현저동은 감옥소 건너쪽 인왕산 기슭을 타고 올라가면서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가파른 동네였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지게꾼이 더는 못 갈 것처럼 숨을 몰아 쉬면서 엄살을 부렸고 그 때마다 엄마는 역전에서 약속한 품삯에다 몇 푼 더 얹어 줄 것을 약속하며 그를 독려했다. 계단을 다 올라가서도 꼬불꼬불한 골목을 요리조리 돌고 또 돌았다, 천엽 속 같은 동네였다. 숨 가쁘게 당도한 우리 집은 여지껏 스쳐지나 온 골목 속의 딴 집들과 다름이 없는 작은 집이었지만 그나마 전체가 우리 집이 아니라 문간방을 한 칸 세를 들어 살고 있는 것이었다. 지대가 높아서 문간방 유리창 밑에 있는 오빠의 앉은뱅이 책상에 올라서면 전차 종점이 있는 큰 길과 길 건너 감옥소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까지 혼자서 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고 내리막길만 따라 가다 보면 거기까지 이른다 해도 되돌아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 단칸방에서 옴짝달짝도 할 수 없는 기분은 그때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지독한 불행감이었다. 어떻게 내 집을 못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시골마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골목 속의 집처럼 붙어있지 않고 제각기 텃밭을 거느리고 널찍널찍 떨어져 있었지만 마을은 뉘 집에서 바라봐도 한 눈에 들어왔고, 뉘 집이 감희네 집인지, 뉘 집이 산식이네 집인지 헷갈릴레야 헷갈릴 수 없는 제각기 환경과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군중 속에서 엄마를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했던 것도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인데 어떻게 집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고약한 세상이 다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생각만해도 오금이 붙어버릴 듯이 싫고 무서웠다. 엄마는 집을 잃어버려도 찾을 수 있는 방법으로 집 주소를 알려주고 외우도록 했다. 그리고 수시로 물어봤다. 나는 학교 갈 나이가 다 돼있었고, 시골집에 있을 때는 천, 만까지도 셀 수가 있었고, 암산으로 쉬는 더하기 빼기도 척척 알아 맞춰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떻게 된 게 주소는 외어지지가 않았다. 서로 상관이 없는 그 긴 숫자를 외고 있어야 집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고, 만일 그 숫자를 잊어버리면 이 컷 속을 알 수 없는 대처에서 외톨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까지 가세해서 나를 얼 빠지게 했다, 서울에서의 첫 번째 주소를 이렇게 오래 걸려서 외었기 때문에 그 후 여러 번 거친 딴 주소는 다 까먹었지만 그 주소만큼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현저동 46의 418. 지금으로부터 63년 전의 내 주소이다. 어떤 공갈협박도 어린이를 방 속에 오래 가둘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집 밖을 벗어나 미로처럼 얽힌 골목골목을 답사하고 마침내 전차 종점까지 나아가 찻길을 건너 감옥소 앞 마당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번지수를 외었지 때문이 아니었다. 동무가 생겼기 때문이다. 동무들 때문에 나는 서울의 골목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시골선 내 또래가 얼마 없어서 외톨이일 적이 많았다. 또 시골아이들은 나 만하면 동생을 업어주기도 하고 엄마를 도와 감자를 깎거나 설거지를 하는 등 일거리가 많았기 때문에 나처럼 판판히 노는 계집애는 소외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골목골목에는 아이들이 오글오글 많았다. 그 애들은 사근사근하고 편안한 서울 말로 대문간에서 나를 불렀다. ‘완서야, 나와 놀자’. 그때는 집집마다 대문을 열어놓고 살 때였지만 서울 아이들은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오지 않고 이렇게 대문간에서 노래 부르듯이 동무를 꼬여냈다.
우리들은 좁은 골목에 오글오글 모여서 오럇말도 하고, 공기놀이도 하고, 고무줄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고, 땅바닥이나 남의 집 담벼락에다가 그림도 그리고 낙서도 했다. 놀이에 지치면 쌈박질도 했다. 뭐니 뭐니해도 쌈박질처럼 신나는 놀이도 없었다. 쌈박질할 때는 편을 가르기도 하고 누구를 하나 따돌려서 울리기도 했다. 내가 따돌림을 당하고 서럽게 울고 들어온 적도 있었지만 그날이 가기 전에, 또는 다음날 첫새벽에 나와 놀자는 구원의 소리가 문밖에서 들리곤 했다. 골목은 아이들의 놀이터일 뿐 아니라 온갖 물류의 통로이기도 했다. 그 동네 골목은 바퀴 달린 건 다닐 수가 없어서 남자들은 지고 여자들은 이고 다니면서 물건을 팔았다. 새우젓 장수, 두부장수, 떡장수 등이 제각기 가락을 외치고 다녔고, 엿장수는 가위 소리로, 굴뚝 쑤시는 사람은 징소리로 자기가 왔다는 걸 알렸다. 물자가 귀할 때라 땜쟁이, 칼 가는 사람도 이 동네에 없어선 안될 기술자들이었다. 뉘 집에서 한 번 불러주기만 하면 곧장 그 집 앞에 판을 벌이고 땜질을 하고 있으면 이 집 저 집에서 구멍 난 냄비나 솥 바게쓰를 들고 나오기 때문에 앉은 자리에서 일당을 벌 수가 있었다. 목청을 돋아 손님을 부르지 않아도 장사가 잘 되는 건 물장사밖에 없었다. 지대가 높아 물이 귀했다. 상수도가 현저동과 행촌동의 경계가 되는 큰 길까지밖에 안 들어왔다. 그 곳 있는 공동수도 앞에는 늘 양철 물통이 길다랗게 줄을 서 있었다. 손수 물지게를 져서 길어다 먹는 집도 있었지만 엄마는 몇 번 시도를 해보다가 그것만은 못하겠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물장수를 대서 매일 한 지게씩 물을 사먹었다. 빨래는 독독이 빗물을 받아 해결했고 장마가 진 후엔 인왕산 계곡으로 호청 빨래를 갖고 가기도 했다. 물장수는 새벽에 왔다. 물장수는 물지게에선 삐걱 삐걱하는 독특한 소리가 났다. 삐걱 소리 다음에는 독에 물 붓는 소리가 철썩하고 들렸다. 이불 속에는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이상한 고장에 와 있다는 게 실감되곤 했다. 세상에 물을 다 사먹다니, 사먹는 물이기 때문에 서울 와서 가장 많이 들은 잔소리가 물 아껴 쓰라는 소리였다. 세수 물에 발 닦아라. 발 닦은 물도 버리지 말아라, 걸래 빨게. 새벽에 물장수 소리와 함께 잊을 수 없는 소리는 깜깜한 밥의 골목을 누비는 ‘만주나 호야호야’ 하는 구슬픈 소리이다. 만주는 만두고 호야호야는 방금 만들어서 따끈따끈하다는 소리라고 했다. 엄마는 한 번도 그걸 사주지 않았고, 남이 먹는 걸 구경도 한 적이 없지만 이불 속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입이 궁금한 것도 같고 마음이 헛헛한 것도 같은 생소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렇게 골목은 나에게 또래들과 접속할 수 있는 암호였고, 그들과 만나서 무언가 도모할 수 있는 광장이었고, 외부에선 신기한 것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통로였고 문득문득 탈출을 꿈꾸게 하는 미로이기도 했다. 놀이터가 따로 없는 우리들은 골목을 벗어나 전차가 되돌아가는 종점을 지나 감옥소 앞마당까지 진출을 했다. 골목을 벗어난 해방감보다도 금기를 어겼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모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음이 오싹오싹했다. 우리 엄마도 그러했지만 딴 집 어른들도 아이들이 감옥소 앞마당에 가는 걸 싫어했다.
어른들은 죄수를 전 중이라 불렀는데 벽돌담하고 비슷한 붉은 옷을 입고 발목에 쇠고랑을 차고 바깥으로 노역을 나왔다가 돌아가는 전중이를 아이들이 보는 걸 매우 꺼려했다. 그들 중에는 파렴치범도 있지만 독립투사도 있다는 걸 어른들은 알고 있었으련만 둘 다 두려웠던지 덮어놓고 안 보여주려고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거기 가 본 아이가 시범을 보여준 대로 감옥소 앞 너른 마당에서 정문까지 올라가는 계단 양쪽에 있는 양회로 바른 홈통을 미끄럼틀 삼아 온종일 미끄럼을 탔고 내복 엉덩이가 너덜너덜해지는 바람에 엄마에게 감옥소 앞마당까지 놀러 갔었다는 걸 실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나를 사정없이 패주고 나서 언제나 이 끔찍한 동네를 면할꼬를 장탄식 했다. 골목 말고는 서울에는 높고 큰 것이 많았다. 동대문과 남대문의 위용은 어린 마음에도 입이 딱 벌어지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 주변에 큰 건물이 없어서 더욱 장엄해 보였을 것이다. 남대문도 동대문도 전차길이 돌아가게 돼있는 게 아주 당연해 보였다. 동대문과 남대문은 엄마 따라 친척 집에 나들이 가는 길에 보았고, 종로거리 야시장과 화신 백화점과 지금의 신세계백화점인 삼월 오복점은 엄마가 일부러 데리고 가서 구경을 시켜주었다. 엄마한테 들은 잔소리 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건 입 좀 헤 벌리지 말아라, 바보처럼 보인다는 거였는데 대낮처럼 밝은 밤 풍경과 고층건물에서 받은 충격 때문에 반쯤 얼이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크다 크다 해도 총독부 건물처럼 클 수가 있을까. 크기만 한 게 아니라 당시의 총독부는 담을 쌓지 않고 밖에서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쇠막대기로 철책을 치고 있었는데 쇠막대기는 어른 키 서너 배는 되게 높고 끝이 창같이 생겨서 감옥소의 벽돌담보다 훨씬 삼엄하고 공포스러웠다. 개방과 친군을 가장한 패쇄적인 공갈협박의 전형처럼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거의가 다 복개가 되어 안보이지만 그때만 해도 서울은 도처에 개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더러울 수가 없었다. 우리 시골은 벼농사가 잘 되고 물이 흔한 고장이다. 도처에 흐르는 개울물은 모래알을 셀 수도 있을 만큼 투명하고 우물물은 달았다. 개천으로는 하수도 흘러 드니까 더러울 수 밖에 없는데도 시골의 시냇물과 비교가 되면서 서울서 산다는 게 한없이 누추하고 창피하게 느껴지곤 했다. 만약 시골 동무가 나를 만나서 서울에 와서 저 개천들을 본다면 나를 업수히 여길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더러운 개천에서 빨래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솥을 걸고 양잿물에 빨래를 삶아주고 돈을 받는 사람도 있었다. 내 도시생활은 현저동에서 시작해서 그 후 여러 번 이사를 다녔지만 어떤 동네서건 넓고 좁고의 차이가 있을 뿐 골목을 면해본 적은 없다. 나에게 도시는 바로 골목이었다. 80년대에 비로소 기와집이 추녀를 나란히 한 골목을 면하고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아파트 역시 내게는 곤두서 있는 골목이나 다름이 없다. 몇 동 몇 호라는 번지수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찾을 수 있고 그게 잘 외어지지가 않는다는데 있어서는 더 그러하다. 처음 서울 와서 번지수 때문에 받은 강박관념은 지금까지도 스트레스가 되어 남아있어 숫자에 약하다. 딸들도 아파트에 산다. 그 애들이 각각 어느 아파트에 산다고 분별해서 말할 수는 있어도 동 호수는 몇 년이 지나도 안 외어진다. 이제 욀 생각을 안하고 수첩에 적어놓고 있다. 전화번호도 마찬가지이다. 핸드백을 바꿔 들거나 해서 수첩을 안 갖고 나온 날은 단지 앞에서 우두 망찰을 하고 만다. 그럴 때 내 집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고 해도 내 집 전화번호까지 생각이 안 난다. 그 여러 자리의 숫자를 못 외울 때 나는 뭘까? 삼 년 전 도시를 면하고 집집마다 표정이 있는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한 것도 아마 그런 불안 때문일 듯싶다. 아파트도 곤두선 골목이라 했지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수평으로 이웃한 골목하고 남의 어깨를 딛고 수직으로 치솟은 이웃하고 같을 리가 없다. 고소공포증은 굉장한 고도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다. 변변치 못한 사람은 남의 무등만 타도 고소공포증을 느낀다. 비록 층층이 포개지긴 했지만 옛날 집과는 댈 것도 아니게 너르고 편한 집에 살면서도 사람들은 집에 배겨있지 못하고 그저 밖으로 나돈다. 그건 서로 마주 보고 부대낄 수 없는 수직의 인간관계에서 얼굴을 보고 길을 묻기도 하고 양보하고 미소 짓기도 하고 다투고 삿대질을 하면서 부대낄 수 있는 평평한 관계가 그리워서가 아닐까. 도심의 고층건물 스카이 라운지에서 사통팔달 널찍널찍 달 닦여진 도로망을 빈틈 없이 메우고 질서 있게 흘러가는 차량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저거야말로 움직이는 골목, 바퀴 달린 골목이구나 싶어 절로 감탄을 하게 된다. 나의 도시에 대한 인상의 원점은 골목이다.
박완서 / 소설가
참여작가
최진욱, 주명덕, 김호석, 황인기, 정세라, 염은경, 정연두, 한계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