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옛말이 무색해진 지 오래다. 지형적 물리적인 변화뿐 아니라 논리와 사고개념의 변동, 생활패턴의 변모 등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고 전개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 중에도 우리사회가 경험하는 뚜렷한 양상 하나를 꼽아본다면,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역할이 긍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예술, 교육, 사회분야는 물론 이제 과거에는 남성이 독점하던 분야에까지도 여성이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는 우리사회가 그만큼 외형적으로 성숙해졌음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적으로도 여성의 지위가 남성의 지위와 질적인 대등함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미술계에서도 여성작가들의 작업 활동이 예전에 비해 두드러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작업의 성숙기라고 할 수 있는 40대를 고비로 여성이 그 역량을 지속적으로 발휘하면서 영향력 있는 작가로 자리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로 보인다. 한국사회가 외형적으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깔린 여성에 대한 제약 또는 편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일민미술관이 기획한 <미완의 내러티브 endless narrative>展은 제약된 여건 속에서도 일관된 열정으로 작업을 지속해온 여성작가 3명을 새로이 주목하고 이들에게 보다 폭넓은 작업세계를 이루어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보고자 마련한 전시이다.
3명의 여성작가를 찾는 일은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우선 40세를 전후로 하며, 작업에 대한 에너지와 열정을 지니고 있는 여성작가라는 조건을 설정했다. 작가 군이 방대하게 형성되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조건으로는 트라이앵글의 세 꼭지점을 형성하듯 대조적인 작업을 하는 3명으로 조합함으로써 팽팽한 긴장감을 생산하고 기획의 완결성을 갖고자 했다. 우선 염성순을 한 점에 놓았다. 그리고 다양하게 형성되는 세 작가들의 조합을 시험하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강미선을 한 점에 놓게 되면서 마지막 한 사람을 정하기는 쉽지 않았고, 그리고 많은 노력을 필요로 했다. 염성순의 화려하면서도 애정소설 같은 섬세한 경향과 강미선의 시간의 축적이 배어있는, 전통적이면서도 담백한 경향과 조화를 이루되 또 한편으로는 대조를 이루는 작가를 찾아야 했다. 기계적이며 차가운 감성이 엿보이는 작업이면 어떨까 고민하며 자료를 뒤적이고 작업실을 드나들었다. 염성순의 작업실은 정릉언덕 아래 연립주택에 살림집을 겸하여 있었다. 마침 그 무렵에 있었던 관훈갤러리의 개인전이 끝난 후 방문하나 그 공간이 넘쳐나는 작업들로 검정 뿔테 안경, 담배연기, 그리고 느릿느릿한 말투. 아마도 70년대 보헤미안의 풍경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염성순은 작품을 하나하나 들춰내며 자신이 표현하고자 한 것에 대해 세세하고 꼼꼼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를 테면, 꿈틀거리는 선과 현란한 원색으로 메워진 유기체 형상에서 한 점을 찍어 이것이 눈이라 하고, 또 한 부위를 가리키며 꼬리라 하고 또 마음이라 하고, 하는 식이다. 갑자기 당황스럽다. 외형적으로 내비치는 자유분방함과 그녀의 설명이 쉽게 매치가 되지 않으며 한 순간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보여주던 그림 중에서 이전과 다른, 선이나 색채가 비교적 단순하게 처리된 작품, ‘화무십일홍’이 눈에 들어왔다. 작업을 지켜보기 시작한 지 일년이 지난 후, 색채의 대비에 주력했다며 내보이는 새 작업들은 정리가 되고 다듬어져 보인다.
보색관계에 있는 색채를 맞부딪치는 과감한 시도는 ‘그린다’는 것의 진실을 전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화폭에 뿜어내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듯, 작가의 캔버스가 마냥 왜소하게만 느껴진다.
아마도 염성순은 경쟁의 굴레로 엮어진 현대사회에서 여성 예술가로 겪게 되는 내면의 상처를 끊임없는 붓질과 펜 놀림을 통해 보듬어 가는, 치유로서의 미술을 행하고 있는 지고 모른다. 작가는 잠재된 의식의 흐름, 또는 내재된 욕망의 모습을 그리기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주어진 현실로부터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무너지는 봄’, ‘잉태하는 달’ 등 마치 문학작품의 제목 같은 작품 명에서도 그녀가 꿈꾸는 다른 세상으로의 탈출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설치의 형식으로 보여지는 ‘나무 없는 나뭇잎 하나’ 연작은 평면에서 미처 처리되지 못한 욕구가 입체화되어 분출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세밀하게 전개되는 무수한 획의 흐름이나 음영의 강약은 평면에서 입체로 작업 폭을 확장시켜주고 있다. 그녀의 작업이 간결하고 원숙한 형태로 다듬어진다면 선과 색을 다루는 작가의 면모가 더욱 돋보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강미선은 비교적 탄탄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주요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고, 주목할 만한 수 차례의 개인전을 가진 바 있으며 최근(2002년)에는 중국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다. 그러나 같은 미술대전의 대상작가인 남편은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인정을 받으며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가능한 반면, 그녀는 스스로의 에너지를 그들의 가정에 쏟아 부어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은 분명 일반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어쨌든 남성과 여성간 역학과 지위의 차이를 시인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이에 대한 변명이라 할 수 있을까. 강미선은 주부로서, 여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삶의 소중함을 주목하며 그 연장선상에서 작품의 주제를 선택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녀의 작업에는 밥상, 사발, 수박, 꽃 등 가정주부의 일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들이 곧잘 등장한다. 이는 주변의 사물을 모티브로 적극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녀에 대한 평가의 폭을 좁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깝기도 하다. 왜냐하면 한정된 소재의 선택은 한자 낱장을 겹겹이 붙여 톡톡한 화강석 질감의 새로운 바탕재를 만들어내고 여기에 한국적 조형미를 생산해 내고자 하는 작가의 열정을 가려져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강미선 작업의 특징은 작가가 강조하는 사소한 소박함으로 어우러진 것이라기보다는 삶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는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1995년의 ‘생활일기-방과 후’는 일상의 모습을 그려내면서도 작가 내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호소력 있는 작업이었고, 곧 작가를 눈여겨보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는 이 작품의 특징이 좀더 진보된 형태로 보여진다. 강미선은 그녀 고유의 바탕재 위에 붓끝의 힘을 이용하여 먹을 덧칠한다. 이 연속적 작업을 거쳐 바탕재는 연회색이 되기도 하고 짙은 먹빛을 띠기도 한다. 생각해보니, 한지 겹겹이 붙여내는 일이나 쉴 틈 없는 붓 놀림의 반복이 바로 마음을 다스려가는, 일종의 수행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 그려내는 투박하고 다소 서툴러 보이는 도상이 그 수행의 연장에서 빚어진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기를 기대한다. 세 번째 작가는 유현미다. 이 작가는 강미선이 주부작가로서 지닌 시각과는 다소 다르다.
유현미는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등 작가활동과 관련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이 가능하다거나, 감각적인 취향을 중시하는 근래 미술계의 추세 속에서 감각의 본질을 잘 짚어내고 있다거나, 또한 유면 미술관들의 기획전에 참여하는 작가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앞의 두 작가와는 다른 설정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하고 유현미 작업이 지닌 여성성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한편으로는 그녀의 세련된 표현방식이나 매너가 우리 미술계에 던지는 의미를 찾아보고자 마지막 한 꼭지점에 그녀를 놓게 된 것이다. 유현미가 일관되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의식에 대한 탐구이다. 누가나 꿈에서 겪는 낯설거나 또는 매우 낯익은 경험으로 인해 꿈의 본질을 의심해본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유현미는 유난히 꿈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이를 작업에 반영하고 있는데, 시기적으로는 세 가지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뉴욕 유학시절에는 개인적 혹은 여성적 욕망을 신화를 차용하여 드러내며 현실의 비현실적인 설정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귀국 후 한국사회로서의 진입이라는 환경 변화를 맞으면서 한 사회인으로서 가지는 공포증적 증세가 담긴 작업들을 선보인다. 이 또한 꿈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반영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들과 놀이를 하다가 우연히 발상을 떠올린 퍼즐작업을 통해 무의식의 구조화에 관심을 보인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며 상승되어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소통의 대한 무의식적 집념이다. 과거 그녀의 작업에는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었지만, 최근의 작업은 그 내용이나 대상이 넓어지면서 나와 주변과의 관계 맺기 또는 소통을 중시하고 있다. 특히 지하철 창문에 설치한 퍼즐작업은 안과 밖, 그리고 ‘나’와 ‘타인’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는데, 이는 작가가 의식을 했건 아니건 간에 상당히 중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계설정이 그녀의 작업이 지닌 감각적 요소, 다시 말하면 ‘우리’가 배제된 채로 막연한 서구성의 지향으로 보이는 지점에서 한발 빠져 나올 수 있기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유현미의 아이덴티티가 담긴 세련된 방식에 소통이라는 요소가 더 깊이 부여된다면 그녀의 작업이 더욱 호소력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분주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세 명의 여성작가들에게는 스스로를 40대의 여성작가라는, 일종의 사회적 편견의 대상이라는 전제하에 조명하는 기획의도가 달갑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전시가 대비되는 세 가지 성격의 작업들이 한 공간에서 어우러지기를 바라는 ‘끝나지 않은 내러티브 endless narrative’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도 일민미술관이 많은 여성작가들에게 격려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태령 / 일민미술관 디렉터
참여작가
강미선, 염성순, 유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