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을 가져보았다.
전쟁은 신화를 채우고 신화는 역사를 채운다.
써놓고 보니 마냥 틀린 말은 아닌 듯 하다.
인간은 물질적인, 또는 이념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전쟁이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적 본능의 분출이라 한다면, 신화는 폭력적 본성을 미적으로 상징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대문화를 비롯해 문명이 싹트기 시작할 때부터 신화는 그 문명의 바탕을 채우는 믿음으로 자리해 왔다. 신화는 고유한 문화를 향유하는 공동체적인 유대감을 이루고,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시각문화는 그 문명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된다. 우리가 어떠한 일정한 문양이나 색감을 보며 그것이 속해있는 문화를 떠올리는 것을 바로 그 결과이다. 멀리는 고대 그리스 신화가 그러하고, 가까이는 중국이나 인도의 신화가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경우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느끼게 된다. 우리가 느끼는 문화적 콤플렉스의 시작점이 바로 신화의 부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리의 신화는 지워지고 없어져 버렸다. 우리가 고작 알고 있는 것은 단군이 곰의 아들이라거나 박혁거세가 알에서 탄생했다는 정도일 뿐이다.
신화의 부재는 고대문화가 현대문화와 단절되었음을 의미하고 있으며, 이를 다시 역으로 생각한다면 우리 고유의 신화가 복구된다면 우리 문화가 보다 풍성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하기도 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최근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고구려 벽화에 대한 연구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신화의 많은 부분은 전쟁으로 구성되어있다. 전쟁이라는 욕망의 근원지는 인간이 속한 집단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 집단의 지배자이기도 하다. 지배자의 욕망에 희생되는 수많은 병사들과 그들을 둘러싼 가족은 대의명분에서 밀려난, 잊혀진 존재다.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에서는 전쟁이 현실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전쟁은 잊혀진다. 그리고 후대의 지배자에 의해 전쟁의 가치가 미화되기도 하고 폄하되기도 한다. 여전히 군중은 잊혀진 존재다. 미화된 전쟁은 신화가 되며, 신화는 곧 역사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500년 전, 1000년 전의 역사를 인식하는 길은 단지 누군가의 명을 받은 이의 기록을 통해서 접할 뿐이다. 이 기록이 진실 이길 바라는 것은 무모할 수밖에 없다. 500년은 고사하고, 단 100년, 아니 50년 전의 역사도 때론 신화로 둔갑하곤 한다.
서용선은 우리 역사의 다양한 사건이나 현장의 모습들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조선시대부터 현대사회에 걸쳐 벌어졌던 여러 싸움이나 전쟁들을 아우르는데, 이러한 소재들은 일반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는 테마라는 점에서 낯설기조차 하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작가가 일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이 행하는 미술이 역사를 새롭게 기록하는 작업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미술이 전쟁을 포함해 역사를 시각화하는 역할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그림이 미화된 승리자를 위한 신화가 아닌, 잊혀진 자를 위한 새로운 신화이고자 한다.
서용선은 임진란이나 동학란, 임오군란의 수장(首將)이 아니라 병사나 의병 등 미미하고 힘없는 존재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맹목적인 찬가로서의 전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영문 모르고 희생된 군중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투쟁의 삶 속에 잊혀졌던 군중 즉, 이름 없는 민초들을 그려냄으로써 우리가 표피적인 결과만 알고 있는 전쟁의 참혹한 잔상을 일깨운다. 화면에는 굶주린 농민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부역하는 사람들, 총살형 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또한 전투의 장엄한 현장 대신 지나쳐버릴 사소한 순간의 모습이 표현되기도 한다. 서용선은 보편적 형식에서 벗어난 재현의 방식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서용선의 그림은 감상하기에 편하지 않다. 그의 그림에는 거친 터치와 숨을 멈추게 하는 듯한 핏빛 색채가 담겨 있다. 1990년대 초반에 제작된 노산군(단종)일기 연작은 애환을 간직한 채 비명에 목숨을 잃은 단의 억울한 죽음을 다루고 있고,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에 걸쳐 제작한 도시와 사람들 연작은 풍요로움 속의 외로움, 군중 속의 고독을 껴안은 지하철의 무표정한 군상들을 다루고 있다.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으레 아름답고 편안한 미술작품을 보는 것이고 이를 통해 온화한 안정을 기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서용선의 회화는 다소 섬뜩한 장면을 담고 있기도 하고, 따라서 관람객은 이로부터 눈을 돌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모든 것이 세련된 선으로 빚어지는 지금, 원시적 표현기법의 화면은 생소함을 전달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그림들이 지향하고 있는 일관된 것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진실이 담긴 시각적 신화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의 승리자인 세조가 아니라, 힘없이 스러져야 했던 단종을 주인공으로 부각시킨 것이나 지하철역의 무표정한 현대인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은 서용선이 전쟁을 매개로 시도하는 새로운 신화 만들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등장인물들은 전쟁 그림의 이름 없는 군중과 함께 우리 역사의 새 우상(아이콘)으로 떠올려진다.
작가는 우리가 문자로 인식하고 있는 역사가 다소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우리 역사를 새로이 볼 수 있는 이미지 작업, 다시 말해서 전쟁의 시각적 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우상화되고 있는 우리 역사의 이미지 복원이라는 가치를 담아내고자 한다. 이는 고대신화를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과 함께 우리 신화의 복구를 향해 내딛는 한 걸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리얼리즘 계열 작가들의 전시가 많이 열렸다. 서용선의 작업은 역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들과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민중미술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재생산한 그들의 작업이 우리 사회 속의 문제의식, 그리고 역사의식을 담기에 주력함으로써 우리의 근, 현대사를 되짚어보려 한다면, 서용선은 우리 역사의 새로운 이미지 창조에 관심을 가진다. 붉은 빛으로 각인된 아이콘은 작가가 발산하는 에너지이며 메시지임을 드러내고, 여기서 우리는 서용선 고유의 메타포를 확인하게 된다.
일민미술관이 서용선의 ‘미래의 기억’전을 마련하며, 이 전시가 ‘이야기를 그린다’는 작가 의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풍성한 문화사를 이루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김태령 / 일민미술관 디렉터
참여작가
서용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