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추상미술 작품을 대할 때, ‘이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혼잣말을 한다. 손 가는 대로 붓을 휘두르거나 때로는 아무렇게나 물감을 뿌리거나 또는 점 하나 쿡 찍어 놓거나……더러는 한 가지 색을 정해서 마치 밑 칠 하듯 캔버스를 칠해버리면 되는 일은 일반 대중에게는 더없이 쉬운 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 생각만큼 쉬운 일인가……소위 미술가와 일반인의 차이는 간단히 말해 세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미술가는 그리는 행위를 실제로 한다는 점, 반면 일반인은 안 한다는 점이다. 단지, 나도 이쯤은 할 수 있겠다고 생각만 할 뿐이다. 두 번째는 미술가는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 한다는 점이다. 아침에 했던 붓 놀림을 저녁에도 하고, 어제 했던 캔버스 메우기를 오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인은 그렇지 못하다. 한번쯤은 아니, 조금 더 보태서 서너 번은 흥이 나서 할지라도 열 번 스무 번 하게 되면 그 붓 칠은 그야말로 노동이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가지는 미술가의 구상작업에서 나타난다. 추상미술가로 알려진 작가가 그린 구상 작품을 보면 ‘아, 역시!’ 하는 감탄사가 나온다. 물 흐르듯 여유 있는 필치의 숙련된 화면을 보노라면 그들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임을 깨닫게 된다. 그들의 구상작업은 단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오경환 작가는 40년여의 활동을 통해 ‘우주’를 그리는 화가로 알려져 왔다. 작가는 대형 캔버스에 검고 짙푸른 우주 공간과 화려한 빛을 발하는 행성들을 그리거나, 운석과 기하학적인 도형의 만남을 형상화함으로써 구상의 추상화를 추구해왔다. 소재는 구체적 자연형상이라 할 수 있으나 이것의 결과물은 형상의 추상화이다. 그의 우주는 그 자체를 넘어, 그의 인생이라는 공간에 걸쳐있는 끊임없는 고민의 대상이기도 하다.
대형 우주회화가 작업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에는 소박하지만 작업의 의미를 더해주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일상과 사물을 담은 구상회화들이다. 한 곳에 머물기보다는 어디론가 떠나기를 즐기는 작가는 세계 곳곳을 방문하고 체류하면서 그곳의 풍물을 그려왔는데, 이러한 경험은 작가에게 의식의 자유로움을 선사해 준 듯하다. 이번 전시는 일련의 밤하늘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구상작품들을 만남으로써 한 현대미술가의 작업 일생을 접할 수 있는 기회이다.
작가가 멕시코, 인도, 이집트, 페루 등을 여행하거나 거주하면서 그린 일상, 풍경, 정물, 인물을 담은 스케치, 드로잉, 소품들은 원시적이고 인간적인 내음을 전해준다. 미지의 공간을 산책하는 듯 작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담은 이 작업들은 우주 작업에서 느낄 수 없는 일상적 삶의 속삭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작가에게, 그리고 현대미술에게 더욱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늘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자세를 지녀온 작가는 정년이 지난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전하는 젊은 예술가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는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자, 많은 예술가들의 동료로 긴 시간을 지내면서 결코 한 모습, 한 자리에 안주하는 법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로운 것을 추구해 왔다. 따라서 그의 40여 년 작업세계를 돌아보는 일은 곧 한국 현대미술이 지나온 길을 반추해보는 일이기도 하다.
일민미술관은 우리 주변의 일상적 공간부터 우주적 상상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오경환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전을 마련하면서 구상과 추상이 소통하고 미술과 대중이 소통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이를 통해 대중에게서 점차 멀어져만 가는 현대미술을 반성하고 현대미술이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는 것으로 회생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태령 / 일민미술관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