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해인사 3층 석탑 앞에서 중절모를 손에 들고선 한 청년의 사진이 있다. 조선과 중국을 처음 여행하던 이 일본 청년은 불국사와 석굴암 등지를 답사하면서 조선과 기나긴 인연을 맺게 된다. 90년이 지난 지금, 이 사진은 우리로 하여금 먼 기억 속 여정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미 조선의 항아리의 아름다움을 접했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20여 차례에 걸쳐 조선을 방문하며 조선의 미에 더욱 빠져들게 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깨닫지 못한 미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단지 이론가이거나 또는 단지 수집가가 아니었던 야나기는 이론과 행동이 함께 어우러진 현실감 있는 글과 수집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과 평가를 받았다.
야나기는 석굴암 조각의 가치에 대한 평가나 광화문 철거에 대한 애통함을 담은 글을 통해. 또한 일본의 미가 상당부분 조선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조선 미의 실용적 아름다움을 이론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식민지시대 우리문화의 가치와 조선인의 긍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애를 썼다. 그 노력의 결실은 도자기를 포함해서 생활 미술, 즉 공예를 보여줄 수 있는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서구문물이 동양으로 유입되는 근대화 과정을 겪으며 문화의 절대적 가치가 서양에 있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향을 안타까워하며 야나기는 민중의 생활에서 고유의 개성을 찾아 근대성의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의미 담긴 그의 노고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채, 야나기가 조선 미를 비애의 비라고 했던 것은 식민지 하의 조선을 폄하하려는 시각이 그의 의식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라며 문제가 제기되어왔다.
야나기는 민중의 예술과 공예, 즉 ‘민예(民藝)’ 라는 용어를 만들고 민예운동을 이끌었으며, 조선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민중의 삶이 담긴 공예품들을 수집하고 활발한 저작활동을 펼치며 민족의 다양성을 존중하려 했다. 아직까지도 한국과 일본의 미학을 거론함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민미술관이 마련하는 <문화적 기억–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 전은 야나기가 모은 수집품으로 세워진 일본 민예관의 조선, 일본 관련 소장품과 관련 다큐멘터리로 이루어진 전시이다. 조선의 도자기뿐 아니라 목기, 석기, 짚공예 등 생활 속에서 대중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다양한 민예품을 비롯해서 일본의 민예품, 그리고 조선 미와 야나기 공예론의 영향을 받은 일본 현대공예품들이 전시된다. 그의 컬렉션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이 전시에는 야나기의 행동과 철학뿐 아니라,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위해 함께 조선을 방문하여 기금마련 독창회를 개최했던 아내 가네코의 공연이 담긴 영상물도 보여진다.
일민미술관은 야나기의 문화적 삶, 열정, 사상을 어떠한 편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보이고, 감상하는 이들이 스스로 경험하고 느낄 수 있길 바라며 이 전시를 기획했다. 이러한 의도가 잘 표현될 수 있도록 뜻을 함께 한 일본민예관 고바야시 요타로 관장과 오규 신조 수석연구원, 미무라 교코 국제부 수석, 그리고 관계자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야나기의 시선에서 조선을 돌아보는 이 전시가, 기억을 더듬어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혹은 잃어버린 우리의 참 모습을 찾아가는 밑거름이 된다면 더더욱 의미 있는 일이 되겠다.
김태령 / 일민미술관 디렉터
참여작가
야나기 무네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