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그림, 혹은 어느 책에서 봤을까. 연미복과 같은 차림에 멋진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남자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곱게 단장한 여자가 팔짱을 끼고 거리를, 공원을, 유유자적하듯 거니는, 그 낯익은 이미지들.. 근대 시민사회의 한 단면이다.
‘대중’, ‘대중적’이라는 단어가 다양한 분야에서 키워드로 쓰이는 이 울트라 현대사회에서 대중의 기원은 19세기의 유럽이 아닐까 싶다. 시민이 사회의 주체로 인식되기 시작한 유럽의 근대사회는 정신이나, 제도뿐 아니라 생활의 방식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기계문명의 발달과 편리한 교통, 그리고 철제 건축물의 등장은 대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삶의 주인공으로 가능하게 하는 환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거리를 거닐던 신사와 여인은 곧 철골과 유리로 지어진 아케이드에 도착한다. 여기는 사람의 눈을 휘둥그러지게 하며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환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실내이면서도 야외의 풍경이 펼쳐지는 디오라마 속에서, 각종 기계가 찍어낸 형형색색의 상품들과 진기한 물건들이 널려진 상점들을 배회하면서 대중은 인식하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에게 점점 구속되어간다.
아케이드는 백화점이라는 공간으로 맥이 이어진다. 울트라 현대사회의 백화점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다. 이곳은 현대인들의 요구에 의해 발견되고 채집 되어진 갖가지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 시간에 쫓기는 바쁜 사람이거나 딱히 일이 없이 시간이 넘쳐나는 사람이거나, 나이가 들었거나 어리거나, 여자이거나 남자이거나, 수없이 많은 인파가 백화점으로 모여든다. 유행을 쫓기 위해, 개성을 살리기 위해, 세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시대에 쳐지지 않기 위해 몰려든다. 그 어떠한 지식도 필요치 않다. 단지 구경하고 구매할 뿐이다.
아케이드나 백화점은 아니지만, 발견되고 채집되었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공간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박물관 또는 미술관이다. 박물관의 기원은 문예, 미술의 여신 뮤즈에게 바치는 장소로 시작되었는데, 현재의 기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기 역시 근대사회의 확립과 일치하고 있다. 즉, 아케이드와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유사한 발전적 양상을 가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박물관이라는 공간에서는 구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일정 정도의 지식과 교양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대중은 백화점을 방문할 때와 박물관(미술관)을 방문할 때에 서로 다른 마음가짐을 하게 되고, 따라서 박물관을 갈 때에는 왠지 불편하고 심리적인 부담도 커지게 마련이다.
작가 최정화는 박물관 또는 미술관에 대한 대중의 경계심을 깸으로써 예술에 대한 부담을 덜어내고자 한다. 그는 말한다. 자신에게는 애초에 예술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이 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며, 예술이길 바란 적조차 없으며, 그 결과물은 작품이 아닌 상품일 뿐이라고. 이미 그는 예술이라는 잣대를 놓고 봤을 때 절대적으로 수긍하기 어려운 작업들을 선보여 왔다. 예술이란 좀 도도하고 고매하고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숭고미를 지닌 것이어야 마땅한데, 그의 작업에는 온갖 싸구려와 천박한 이미지들로 가득 차있다. 하긴.. 그는 스스로 예술가가 아니라고 했으니…
그렇다면 최정화가 하는 행위는 무엇일까. 현대미술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작가는 “현대미술은 나의 취미”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생활이 곧 미술인 그에게는 생산하고 소비하는 현대사회의 시스템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최정화는 생산의 주체마저 사회에 맡겨버린다. 시스템화 되어 쏟아져 나오는 공산품들이 행위의 재료로써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이를 자신의 안목으로 조합하고 구성하는 일이 그의 취미인 것이다. 하찮음과 그렇지 않음, 엉성함과 치밀함이 교묘히 교차되는 그 지점에 최정화식 코드가 자리한다. 그 지점을 잘못 짚는다면 그것은 한낱 쓰레기 더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최정화는 또 주장한다. 자신의 작업은 가두어진 전시장이 아닌 일상의 공간에 자리해야만 한다고. 그의 머리를 거친 조합물들은 전통 한옥, 레스토랑, 상점, 문화공간, 거리 등 예상치 못한 곳에 불쑥불쑥 드러난다. 좁은 땅에 만족을 못해서인지, 좁은 안목에 만족을 못해서인지 자신을 불러주는 곳이면 그곳이 지구상 어디든지 간에 단걸음에 달려가 욕망 보따리를 풀어 치우곤 제자리로 돌아온다. 최정화에게 서울은, 그리고 예술은 일종의 휴식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남에겐 목숨과도 같은 것들이 그에겐 휴식이라니…
그의 평범치 않은 행위는 때론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술, 건축, 인테리어, 그래픽 디자인 등 그의 활동영역과 일치하는 분야에서는 최정화라는 존재를 외면하기도 한다. 정석에서 벗어나 있고 너무도 본능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는데, 그의 본능은 노력하는 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어떠한 기호와 글, 심볼과 물질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탐독하고 탐구하며 본능이라는 뼈에 살을 보탠다.
최정화는 발견하고 채집하기 위해 세상 구석구석을 누빈다. 그곳은 왁자지껄한 시장통이기도 하고, 허름한 드럼통 식당이기도 하다. 네온 싸인이 원초적으로 빛나는 오사카의 밤거리이기도 하며, 세련미가 물씬 풍기는 벨기에의 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 거리들을 누비며 온갖 알록달록하고 빠글빠글하며 뻔쩍뻔쩍 거리는 무엇인가를 모아온다. 그 집함물들이 이번에 일민미술관에서 선보인다. 자신이 부정해 왔던 미술관이라는 갇힌 공간에서 최정화 브랜드를 선보인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모순에 빠지는 일이었을까. 생각의 굴레굴레를 넘어 울트라 현대사회의 아케이드(백화점)와 박물관의 모습이 혼재된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대중이라는 이름의 당신은 주인공이 되어 백화점의 미로를 걷듯이 어떠한 지식이나 두려움 없이 미술관 안팎을 그저 걸으며 즐기면 된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 누구의 작품-실제로 전시장에는 많은 작가들의 작품과 컬렉션으로 가득 찬다-인지, 어느 나라 공장의 제조품-태국, 독일, 중국, 한국 등에서 제조된 갖가지 공산품으로 가득하다-인지 애써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어느 폐교에서 퍼온 동상인지, 어느 가게의 마네킹인지, 그리고 그 동상과 마네킹이 인체비례에 맞게 제작되었는지도 살필 필요가 없다. 형형색색의 바구니 벽이 단지 벽인지 작품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 모든 게 바로 당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고 당신은 보는 재미를 느끼면 되니까.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세상은 거대한 박물관이니까.
김태령 / 일민미술관 기획실장, 큐레이터
참여작가
김한용, 구성수, 김상균 외 다수
연출_최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