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문화가 바뀌어가고 있다.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여겼던 시절을 지나보내고, 상실한 많은 부분들의 소중함을 느끼며 주변을 돌아보고 자신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전국 곳곳에 갖가지 이름의 길이 생겨나고 그 길을 마치 수행하듯 걷는 문화도 삶의 변화 중 하나이다. 땅에 발을 디디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기운을 ‘내’ 몸에 두는 것은 바로 ‘내’가 살아있고 또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는 행위이며 존재가치에 대한 확신이다.
늘상 발길이 바쁜 도심에도 많은 변화가 왔다. 차량 위주로 운행되던 대형도로는 육교가 없어지고 곳곳에 보행자 중심의 건널목들이 생겨나면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로움이 없이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게끔 되었다. 무작정 차를 타고자 하는 마음도 거리의 변화된 모습을 느낄 수 있음에 양보하게 된다. 보이는 것도 많아지고 따라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나, 상대적으로 눈에 거슬리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진다. 사회와 ‘나’의 관계 맺기일 수도 있겠다.
걸으면서 만나는 조형물, 신호등, 휴지통 등등 거리에서 접하는 다양한 대상들, 이제까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사물들의 디자인 또는 생김새들은 개인의 의지와 별개가 아닐 것이다. 이들이 공공디자인이며 공공조형물이다. 개인이든 단체이든 공공의 일원이며 공공성은 책임이자 권리이다. 생활 속의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문화가 되고 유산이 됨을 우리들은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건축물은 어떠한가.
눈앞의 경제논리에 급급했던 시절은 건물의 기능적 수행이 최우선 과제였으며 건축물은 건축주의 것일 뿐이라는 인식이 우선했다. 관공서는 민원인이 서류를 떼는 역할을 할 수만 있으면 되고 학교 교사는 학생을 단속할 수 있는 획일적 공간이면 충분했으며 기업의 사옥은 사무기능을 원활하게 돌릴 수 있으면 되었다. 예술교육공간이 독특한 디자인 개념을 담고 있으면 화제가 되었고 예술 공간이기 때문에 창의성이 가능하다고만 여겨졌다.
이것이 얼마나 큰 오류였는가. 공대교육건물이 성냥 곽 세워둔 마냥 매력 없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가. 창의력은 예술가들만의 것이 아니라 공대생에게도 사회대생이나 경영대생에게도 필요조건이었으며 창의적 공간에서 학창시절을 지낼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가능했어야 했다. 만일 그러했다면 지금의 우리 사회는 좀 더 풍요롭고 여유롭지 않았을까.
이제까지 지녔던 의문들과 막연한 생각들, 그리고 최근 최첨단 건축 재료들로 무작정 크기시위 하는듯한 지역시청이나 구청건물들을 보면 그냥 화가 났던 이유들이 터무니없지 않음을 건축가 정기용과 대화하면서 구체적으로 깨닫는다. ‘삶’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기용은 건축가는 건물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설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정기용의 건축물은 스토리텔러이다. 구석구석 숨겨진 이야기는 말을 건넬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교사 옥상위로 대형 창틀처럼 올라간 벽면은 하늘을 향한 거대 캔버스이다. 건물과 건물이 이어지는 사이로 ‘자연’이 친숙한 모습으로 들어와 있기도 하고 실내가 바깥이 되기도 하고 겉이 속이 되기도 한다. 내가 존재하듯이 건축물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며 나와 대화하고 소통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학교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청소년기를 보낸다면 문화적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러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사회적 시스템의 부재가 무척 아쉽다.
건축가 정기용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문화관을 지니고 있기에 다른, 별난 건축물을 꿈꿀 수 있었을까. 그의 건축물을 읽으려면 그의 세계를 알아야 할 텐데, 쉽지 않다.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정기용은 정서적으로 안정적이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의 인생 스토리는 그의 건축물만큼이나 별난 세상살이의 연속이다. 그러기에 그의 설계도면에 끝없는 이야기와 상상이 담겨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년시절의 가족환경은 중심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관찰하는 아웃사이더적인 자세, 즉 사물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성향을 형성시켰다. 외롭다고 여겼던 그 시절, 가극단 공연이나 영화상영이 이뤄지던 극장은 정기용에게 ‘위로’의 장소가 되었는데, 후에 그의 작업세계에서 ‘위로’의 의미는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
중학교 미술반, 수채화와의 만남, 그의 인생의 첫 스승과 둉료들, 자율적 커리큘럼, 도서관 등은 청소년기 정기용을 성장하게 한 키워드들이었다. 서울대 미대에서 수학하며 우리국토 답사여행, 문화유산, 프랑스문화, 실존주의, 역사 등에 대해 눈뜨고 자각하게 된다. 이어진 프랑스 유학시기는 문화적 쇼크와 문화적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시기였다. 철학자들의 논쟁풍경과 ‘축적된 역사’의 풍경을 접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올곧게 세우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그 자체로 요즘 말하는 통섭의 학문을 한 것이다. 그 곳에서 Interior Space를 공부하는 실내건축을 시작으로 건축, 그리고 도시계획을 공부하며 건축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 생긴다. 절망이 희망으로 넘어갔다고 그는 표현한다.
1986년 서울로 돌아온 후 정기용의 삶은 건축을 통한 교육, 건축의 사회적 역할, 건축의 공공성으로 전개된다. 건축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서울건축학교를 설립했고 여름 워크숍을 개최해 왔으며, ‘건축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건미준)’을 결성하여 건축제도와 행정에 대한 개혁을 건의하고 있다. 건축물은 공동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건축물들의 집합으로 이뤄진 도시는 고유의 역사가 축적됨으로써 아름다움이라는 가치가 형성된다는 생각은 건축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공중목욕탕이나 천문대, 물레방아가 있는 면사무소, ‘위로’의 다락방이 있는 기적의 도서관, 노년의 가치를 존중해 주는 노인복지기관, 망자를 떠나 보내며 살아있는 자의 현재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추모의 집, 세계와의 소통을 일깨워주는 학교와 기숙사…… 이들은 그가 학문으로 배웠던 지식을 삶의 형태로 전달하는 결과들이다. 그는 건축학도들에게 건축을 가르치는 건축교육자일 뿐 아니라 대중에게 ‘집’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일깨워주는 생활교육자이기도 하다.
일민미술관은 정기용 전시를 마련하며 그의 건축물을 결과물로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건축가의 형성과정과 그의 건축관, 세계관을 정리하여 보여줌으로써 일반 대중이 건축과 사회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기용은 말한다. 그는 건축가가 공학도나 설계자일 뿐 아니라 인문학, 철학, 사회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생각하는 지식인이자 삶의 전망을 다루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대중이 알아주길 바란다고. 그는 또한 건축은 부동산이 아니라 문화의 하나이며, 건축물은 사유재산이지만 공공성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대중이 이해해 주길 희망한다. 이것은 곧 일민미술관의 바램이기도 하다.
김태령 / 일민미술관 관장 겸 기획실장
참여작가
정기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