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의 문화-세계의 문화, 전통의 문화> 전을 기획하며
올해는 일민 김상만 선생이 탄생하신 지 100년이 되는 해이자, 작고하신 지 16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민미술관은 1999년 일민 선생 작고 5주기를 맞아 일민 선생이 수집한 주요 컬렉션을 중심으로 <일민의 숨결-시서화와 공예>전을 열어 그의 문화적 성향과 세계관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번에 마련하는 <일민의 문화-세계의 문화, 전통의 문화>전은 일민 선생이 한국 현대사 발전시기인 1949년부터 1994년까지 동아일보에 재직하는 동안의 문화활동과 관심, 취향을 보여주는 유물자료들과 이 기간에 동아일보가 벌였던 문화사업과 행사에 관련한 자료, 사진, 신문기사, 관련 유물, 인쇄물 등을 통해 현대문화의 구축과 성장의 일면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전시입니다.
일민미술관은 하나 된 民의 단합과 조화를 꿈꾸었던 일민(一民) 김상만 선생의 유지를 기리고자 설립된 일민문화재단 산하의 미술관입니다. 일민미술관은 일민 선생의 정신을 받들어 보통사람의 역사관과 문화관이라는 잣대와 덕목 아래 세계 속 우리문화발전과 전통계승을 추구해나가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나라 시각문화의 시사성, 대중성, 정체성을 중시하는 전시를 기획하며 전시 이외에 시각이미지들을 아카이브화하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일민시각문화’발간과‘다큐멘터리 아카이브’,그리고 일민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새로 시작되는 ‘한국 근현대 미술의 창작주제와 방법 아카이브(가칭)’가 그것입니다.
‘일민시각문화’는 우리 생활 속 다양한 이미지들을 주제별로 수집한 아카이브이며,‘다큐멘터리 아카이브’는 국내외 독립 다큐 영상들을 주제별로 수집하고 있습니다. 일민문화재단과 일민미술관의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현대사회가 이미지의 홍수 속에 존재하지만 막상 이것들이 제대로 정리되고 분류된 결과물은 없다는 안타까움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들의 근원은 바로 일민 선생의 수집벽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이번 기획전을 준비하면서 특히 이런 점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일민 선생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보관하도록 한 분이고 기록의 중요성을 아주 오래 전에 깨달은 분입니다. 동아일보 옛 사옥이나 수장고, 사무실의 벽장, 책상 서랍에 이르기까지 촘촘히 쌓여있는 수많은 자료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현대문화사 관련 책을 엮어낼 만합니다. 1960년대 연쇄소설의 삽화나 필적도 소홀하지 않았던 일민 선생의 수집벽은 용도 파기된 신문인쇄기계와 당시 활자들이 신문박물관 설립의 주요 유물로 재 탄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오래된 물건들을 뒤져내면서 오랜 시간 잠자던 자료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새롭게 빛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일민 선생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가 모은 미술품들은 일민문화재단을 설립하는 밑받침이 되었고, 동아일보의 신동아, 여성동아, 음악동아 등에 게재되거나 연재되었던 표지화, 삽화, 신년축하그림, 휘호, 명사원고 등은 동아일보가 한국 현대문화를 키워오는 데 필요한 역사적, 문화적 보존자료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민 선생은 사진기록과 음원 기록에도 유달리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저의 유년시절, 할아버지 댁에 빼곡히 쌓인 앨범이 어린 저에게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일민 선생은 해외에 다녀오시거나, 유명 인사들과의 만남이나 초청만찬 등의 행사 후에는 어김없이 사진을 정리하시고 보관하셨습니다. 또한 당시로서는 드물게 무성 영상 녹화기를 사용해 손주들이 뛰어 노는 모습을 담도록 하시곤 했는데, 사진앨범이나 영상물을 주의 깊게 살피시던 당시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클래식을 즐겨 들으시던 일민 선생의 책장에 꽂혀있던 녹음테이프들은 동아일보 주최 연주회 실황을 녹음해 라디오방송으로 내보냈던 것들이었음을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흘러 영상기자재들의 방식도 바뀌어 이제는 전문작업을 거쳐야만 보고 들을 수 있는데, 이번 전시에서 베를린 실내오케스트라 연주회(1962년 11월 27일 방송), 명인명창대회(1963년 5월 29일 방송), 런던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내한공연(1969년 9월 23일 방송) 등 그 자료의 일부분을 복원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의 문화사업은 일민 선생의 문화적 인성과 어우러짐으로써 더욱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찍이 영국과 일본에 유학하여 선진문물을 접한 일민 선생은 올바른 예술문화가 한 나라의 성숙도를 결정하는 척도라는 것을 깨닫고 예술 척박 기에 해외 유수의 예술인과 단체들을 초청해 연주회와 공연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또한 한국민속공예대전, 동아연극상, 동아음악콩쿠르, 동아사진콘테스트, 동아무용콩쿠르, 동아미술제 등 공모전과 콩쿠르를 창설하여 우리나라 문화인재들을 발굴하고 그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사업들에 관한 포스터나 관련 인쇄물, 사진 등도 잘 보존되어 전시에 나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자료들을 한자리에서 살펴보니, 사업 그 자체의 의미를 넘어서 우리 현대문화가 자리잡아 갈 당시에 문화가 사회에 기여하는 바를 깨닫고 실행에 옮긴 동아일보와 일민 선생의 문화적 인식세계를 종합적으로 알 수 있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결과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민 선생은 저에겐 할아버지이자 그 뜻을 받들어 가슴에 품고 가야 하는 메타포입니다. 一民의 정신은 저로 하여금 문화주축으로서 사회에 책임과 의무를 다하도록 끌어주고 밀어주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일민 선생이 따스하면서도 무척 엄격하신 분이셨던 것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질책과 반성이 따른다는 가르침을 주신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할아버지를 뵈러 가회동으로 가는 일요일이면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습니다. 항상 공손해야 했고 절도 있으며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했기에 두렵기도 한 존재였지만, 할아버지를 통해 경험하는 신 문물은 설렘이기도 했습니다. 공항, 비행기, 여행가방, 무비카메라, 파이프, 상아 조각물, 해외 인형 등은 그분을 통해 알게 된 것들입니다. 할아버지는 정원(서울시 종로구 계동 인촌 고거)에서의 만찬도 즐기셨습니다. 어릴 적엔 멋스러운 음악과 음식들, 불꽃놀이만이 관심 대상이었는데, 한국을 방문한 해외의 인사들이거나 예술인들을 위한 행사였음을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일민선생이 문화의 가교 역할을 하셨던 사실을 사진자료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1층 로비와 일민미술관 3층 전시실에서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크게 세 파트로 나뉘어 구성됩니다. 우선, 동아일보 로비에는 ‘동아일보와 한국현대문화’라는 주제로 일민 선생 재직 중에 행해졌던 문화사업에 관련한 신문지면, 포스터, 팸플릿, LP판, 신춘문예 당선작 발간도서 등과 동아일보 초청 외국발레단, 오케스트라, 오페라 공연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합니다. 일민미술관 3층 전시실에는 두 번째 주제로 일민 김상만 선생의 초상화를 비롯해 그의 애장품, 편지, 문서, 훈장, 명사필적, 관련 영상물 등 그의 개인적 취향이 담긴 물건들을 전시하며, 세 번째 주제로 동아일보 문화 관련 사업을 통해 소장하게 된 작품들을 포함하여 일민문화재단 소장품, 재단과 미술관의 사업 및 전시자료들을 보입니다.
일민 선생이 선친이신 인촌 선생의 뒤를 이어 사회적 격변기 속에서 동아일보, 고려대학교, 중앙중고등학교를 잘 지켜내고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했던 일은 축복받은 명예이면서 한편으로 피할 수 없는 굴레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미처 짐작도 할 수 없었던 그의 갈등과 고뇌가 일민 선생이 매진했던 다양한 문화 활동과 중첩되면서 一民을 실현하는 미술관이 될 수 있기를 다짐해 봅니다. 아울러 이번 전시에 보이는 많은 자료들이 우리 현대문화사의 채워지지 않은 빈칸을 메울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김태령 / 일민미술관 관장 겸 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