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광고를 뜻했던 용어인 ‘고백(告白)’을 타이틀로 삼은 이 전시는 현대소비문화에 대한 고백 혹은 광고를 매개로 현대사회와 대중의 가치관 읽기의 시도라 할 수 있다.
<고백>전은 그 동안 열렸던 광고전시나 광고를 차용한 미술작품 전시와 다른 형태를 지닌 통합적 성격의 전시이다. 광고나 미술은 동시대상을 반영하는 시각이미지라는 공통적 요소를 갖고 있음에도 상업적, 순수 예술적 영역으로 나뉘어 서로에 대한 로망만 간직한 채 각각의 필드에서만 그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일민미술관은 두 영역이 합쳐지고 더불어 광고와 대중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설문, 연구자료와 이론 등이 합쳐지면 현대물질사회의 대중, 즉 ‘나’의 자아상을 확인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이 전시를 마련했다.
근대도시, 광고
근대는 지금, 여기, 나를 시작하는 주요 단서이다. 문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김없이 언급하게 되는 단어 ‘근대’는 그러나 쉽게 정의할 수 없고, 경계를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역사, 도시, 문화, 사회, 대중 등 모든 분야를 거론할 때 근대와 근대성은 피해갈 수 없는 지점이고, 따라서 근대를 서두로 시작해서 현재를 언급하는 모든 이들에게 근대는 커다란 빚을 지운 셈이다.
광고 역시 그러하다. 산업화 과정에서 근대 도시가 형성되었고, 도시의 소통이 인쇄매체에 의해 확산되면서 근대성은 더욱 공고히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인쇄매체는 알리고자 하는 자와 알고자 하는 자들 사이의 시소(seesaw) 게임장-권력이 되었든, 교육이 되었든, 또는 사업이 되었든-이었고,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그 게임의 기능을 활용할 수 있었다. 근대의 다양한 상품들은 신문과 잡지 등 인쇄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정보와 가치를 광고함으로써 상품과 대중의 관계를 형성했다. 대중은 상품을 구입(buying)함으로써 모던(modern)의 일원이 된 것이다.
현대소비사회의 대중은 이제 상품을 사는(buying) 자가 아니라 브랜드를 찾아 상점을 떠도는(shop(p)-ing) 자가 되었다. 대중은 추위를 막는 옷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입고 마시는 상품의 브랜드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이미지를 구상하고 표현하고자 한다. 특정회사의 로고가 부각된 점퍼가 청소년 세대의 상징으로 읽히며, 외우기 힘든 아파트 이름은 품격 있는 계층으로의 안도감을 유도한다. 커피전문점 로고가 찍힌 커피 잔과 현대인의 필수품이 된 핸드폰의 브랜드는 개인의 기호와 성향, 정체성의 판단 기준이 된다. 현대사회에서 소비는 존재하기 위한 행위가 되었다. 광고는 소비를 통해 존재감을 확인하고픈 현대인의 심리를 다양한 설득언어를 통해 자극하고 부추긴다.
120년 한국광고
일민미술관이 마련하는 <고백>전은 광고와 대중, 광고와 생활, 광고와 소비심리 등 광고와 연관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는 전시이다. 1층의 1부는 ‘한국광고 120년’을 담았고, 2층과 3층의 2부에서는 ‘8가지 키워드의 광고와 미술, 대중’을 주제로 전시한다.
1부 ‘한국광고 120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광고 ‘덕상 세창양행 고백’부터 개화기, 일제 강점기, 경제성장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요 광고들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준다. 서두에 언급하였듯이 광고의 최초 용어가 ‘고백’이었다는 점은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다. ‘고백’은 진실되게 솔직한 사실(fact)를 알고 싶어 하는 소비자의 바램과, 과장으로 소비자를 현혹하지 않겠다는 생산자의 의지가 담긴 용어로 선택되지 않았을까. 이 용어가 ‘광고’로 바뀌었다는 것은 솔직함보다는 널리 알리는 것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리라 추측해 본다.
신문 등 인쇄매체에 실린 광고들로 이루진 연대기적 광고모음은 광고사로 보는 한국의 역사이기도 하다. 통치권력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광고도 변천했음을 보여주며 광고와 시대의 상관관계와 생활문화를 일별할 수 있게 한다. 시각문화는 시대를 읽는 주요코드이다. 광고 속 시각이미지뿐 아니라 표현문구, 서체의 도열방식이나 인쇄기술까지 총체적으로 시대를 읽는 요소들로 작용한다. 다양한 문화코드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작용하고, 후대에 복고 또는 새로운 방식으로 차용되어 쓰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여기, 나를 알 수 있는 대중시각이미지와 기록의 중요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현대광고, 8가지 키워드
2부는 ‘8가지 키워드의 광고와 미술, 대중’을 주제로 우리 사회의 가치를 탐색 하고자 시도했다. 2000년대 이후의 광고를 중심으로 광고가 소비자를 설득하거나 소비자가 설득 당하는 방식을 8개의 집합체로 나누고 각각의 해당 그룹에서 대표성을 띤 키워드를 선정했다. 성공(Success), 미래(Future), 섹슈얼리티(Sexuality), 수퍼 파워(Super-power), 정체성(Identity), 신뢰(Trust), 내러티브(Narrative), 하이퍼 리얼리즘(Hyper-realism)이 그 8가지다. 이 분류는 기획의 주관적 입장에서 이뤄진 것으로, 소비자 즉 나의 입장에서 볼 때, 광고가 취하려는 의미생산-목적이거나 방식이거나-이 위에 언급한 8가지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각각의 키워드는 다양한 하위 코드들을 품고 있다. ‘성공’에는 부(富), 소유, 행복, 야망, 존경, 타인의 시선 등이 존재한다. ‘미래’는 건강, 자연, 환경, 자산 그리고 상대적으로 읽히겠지만 불안과 자극을 함께 그룹핑 해보았다. ‘섹슈얼리티’는 섹스어필, 메트로섹슈얼 뿐 아니라 젠더(gender)라는 개념까지 확장할 수 있겠고, ‘수퍼파워’는 기능성, 하이테크, 초(超), 과장, 스마트 등으로 보았다. 환경, 산업, 노동의 가치, 캠페인, 참여 등으로 ‘신뢰’를 생각했으며, 자유, 평등이 보장될 때 ‘정체성’의 의미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내러티브’는 나의 이야기, 진솔한 리얼리즘, 감성, 공감의 또 다른 표현이며 소비의 주체가 바로 ‘나’라는 심리를 드러낸다. ‘하이퍼 리얼리즘’은 환상, 판타지, 허구를 포함하여 모든 매체적 특성의 혼재이다. 8가지 키워드는 하위 코드들의 지배개념이 아니라 상징이고 이 상징들은 곧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이다.
전시는 8가지 키워드를 다양한 자료와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각각 키워드의 메인 주제를 추려 그것을 뒷받침하는 설문자료, 연구자료, 이론, 보도기사, 인쇄광고, 영상광고들을 병렬하고 그 주제와 연결되는 미술가의 작품들을 함께 전시했다. 한 자리에 모일 기회가 거의 없는 영역들을 모아 통섭의 전시를 만들고자 노력했으며, 따라서 미술관의 전시임에도 작품들은 자체로서의 완결성보다는 마치 개념풀이 형식으로 전시된다. 광고 또는 상품과 연계된 작업을 한 작가들(이완, 김신혜, 조경란, 난다, 권우열)과 광고를 차용하지는 않았지만 해당주제를 이해하는 데에 풍부하게 도움 줄 수 있는 작가들(권경환, 서찬석, 신경진, 김수영, 최두수, 김현준)이 참여했다. 또한 전시연출(윤사비, 이완, 워크룸)과 구성에 있어서도 다양한 협력이 이루어졌다. 이들의 작업은 제품이 아니라 브랜드를 구매하는 현대소비문화에 대한 ‘고백’을 더욱 용이하게 도와준다.
광고, 널리 알리는 것의 영역은 거대하고 무한정하다. 이 전시에서 다룬 광고는 미디어를 통해 소통되는 제품광고들에 국한되지만, 세상에 광고가 아닌 것이 있을까. 전단지나 간판, SNS를 통해 전달되는 다양한 종류의 광고가 있고 개인이나 단체는 패션, 스타일, 슬로건, 캠페인 등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광고한다. 문화는 다양한 요소들이 혼재된 카오스에서 형성되는 일정한 질서이다. 일민미술관이 마련하는 <고백>전이 동시대 문화이미지에 담긴 가치관과 문화관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
김태령 일민미술관 관장/기획실장
참여작가
이완, 김신혜, 조경란, 난다, 권우열, 권경환, 서찬석, 신경진, 김수영, 최두수, 김현준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