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複製)와의 잠행(潛行)
채집된 생명과 시간의 화석들
이번 양만기의 ‘복제정원’전은 크게 두 가지 중심축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 하나는 표현의 방법으로서 복제성을 지닌 기계와 오브제를 사용함으로써 ‘기억의 노스텔지어’를 재생산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재생산이라는 의미는 이미 폐기된 물건들이나 복고적 기록의 파편들을 골동품 컬렉터(collector) 혹은 편집증적 환자와 같이 집요하게 현재화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또한 기억의 역류(逆流) 내지는 시간의 가역성(可逆性)에 대해 새로운 사색을 갖게 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이미 만들어진 비디오 필름이나 16mm필름에 자신의 흔적들을 개입시킴으로써 이중구조(二重構造)적인 이미지들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이중구조는 이미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의 의지(복제적 생산물)에 자신의 사고를 유전자 이식시킴으로써 기존의 영상을 탈바꿈시키고 변이된 새로운 종(種)을 생산해 내는 것으로, 이러한 점에서 그가 말하는 다윈의 진화론적 관점이 이해되는 것이다.
‘기억의 노스텔지어’로서의 맥락을 잘 보여주는 것이 전시장 안에 들어서면서 만나게 되는 유리상자이다. 이 안에는 오래된 양만기의 가족들 사진과 사진첩, 일제시대 전쟁을 위한 채권들, 복제된 달러, 여행용 알루미늄 가방, 오래된 그러나 아직도 소리가 나는 라디오, 그가 수집한 작은 책들, 조개 껍질과 모조품 등 잡동사니들이 들어있는 상자들이 놓여져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양만기의 가족사(家族史)이자 자신의 성장을 이야기해 주는 개인사적 소도구들이다. 이 유리상자는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으며 무엇을 생각하며 자랐는지를 보여주는 회고적인 기억의 복제물들이며, 이 전시의 프롤로그인 셈이다.
다음으로는 짚으로 만들어진 입방체에 복제된 개화기 때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사진들과 사진을 감광하면서 변조시키거나 태운 것을 다시 복제․인화한 것이 걸려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익명의 사람들의 주민등록번호 혹은 연도가 화물칸의 짐에 표시하는 꼬리표에 적혀 매달려 있으며 이것을 다시 짚끈으로 묶어서 유리상자 안에 가두어 두고 있다. 마치 박물관의 박제품 처럼 느껴지는 이 복합적인 매체로 엮어진 작품에서 우리는 시간의 열차를 타고 과거로 회귀하는 듯한 복고적 향수를 맛보게 된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변조와 합성, 해체와 결합 등이 가능한 복제의 속성을 통해 기록성과 시간의 의미를 지닌 새로운 변종(變種)인 것이다. 또한 실제 나무에 사진•인화한 얼굴들을 철제프레임에 넣고 이것을 마치 나무 가지에 부착한 작품에서는 인간의 표정을 생성하고 있는 이상한 식물을 연상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변이로서의 생태계의 구조에 대한 양만기의 인식은 동양인/서양인, 황인종/백인종 등의 사진을 실크 천에 프린트하여 서로 중첩시킨 작품에서는 서로 다른 인종이 합성되는 독특한 시각적 환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곰 인형을 해체하고 이것을 뒤집거나 서로 다른 형태로 이어 붙인 후 앵무새와 결합한 시킨 작품은 그의 또 다른 조작에 의한 복제물이다.
이번 양만기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이중구조로서의 영상작업은 그의 변화적 징후를 엿보게 하는 작품형식으로 다가선다. 이러한 계열의 작품은 1920년대에 연합군의 해군들을 교육하기 위해 제작한 16mm 필름을 사용한 영상작업, 디즈니랜드 사에서 제작한 <알라딘과 요술램프>란 만화영화에 문자를 넣거나 스크래치를 가해 이미지를 변조시킨 필름, TV방송용 <동물의 왕국>비디오필름에 끝없이 반복 또는 곱해지는 숫자가 동물의 움직임과 함께 중첩되어 흐르는 입체설치작품, 관람자들이 철망으로 둘러쳐진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감시카메라로 포착된 상황을 가설의 집안에 모니터로 영사하게 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우선 바다에 빠졌을 때 살아 나가는 방법을 교육용으로 찍은 군사용 16mm 필름은 호주의 박물관에서 구한 것으로, 그는 이 필름에 일정한 스크래치를 가하고 이를 하얀 방석으로 만들어진 스크린에 투사하게 된다. 보통 영사물은 어두운 곳에서 투사되는데 그는 이것을 밝은 조명 속에서 영사함으로써 헤엄치는 사람의 몸짓만이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춤을 추듯이 느껴지게 하고 있다.
이것은 영상의 기록성을 부각시키면서도 영상에서 추출할 수 있는 동적인 요소 위에 현재의 흔적을 개입시킴으로써 영상 그 자체의 시간성을 무화시키고 조형적 관심으로 치환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영상이 가진 기록성과 가역성(可逆性)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데 그것은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는 사진이나 영상의 특성을 회화적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변조시킨 것으로 단순한 화면으로 인해 마치 탈색한 빨래 같은 무미건조한 작품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희귀한 필름을 대한다는 사실, 복고적 시간과의 만남, 물이 사라지고 허공에서 유영하는 듯한 새로운 이미지와 공간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삼면으로 이루어진 입체구조물 작품은 지리산의 풍경과 음식 그리고 손을 사진복제로 스티로폼에 인화하고 정면에 액정소형모니터를 설치한 것으로, 의자에 앉았던 어떤 사람들과 나누는 무언의 대화를 상징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정면에 설치된 비디오 모니터에서는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동물의 영상에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숫자들이 오버랩되어 흐르고 있는데 이것은 개체의 번식에 대한 수학적 법칙을 암시하는 기표이다. 여기서 그는 종의 번식, 동물의 세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사색을 입체화된 복제물과 영상에 투사함으로써 하나의 ‘시간성을 가진 미디어 복합구조물’을 생성하고 있는 것이다.
일민미술관 학예연구팀
참여작가
양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