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후의 사진, 무엇을 할 것인가> 신혜영

《Super-fine: 가벼운 사진술》 전시비평

신혜영, 미술비평
동시대 미술에 관한 강의와 평론을 하고 있다. 박사논문 『한국 미술생산장의 구조 변동과 행위자 전략 연구』(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2017)를 비롯해, 예술과 사회의 관련성 아래 다양한 예술 실천과 문화 현상에 관한 연구와 비평을 진행 중이다. 번역서로 『사진이론: 사진 해석을 둘러싼 논쟁과 실천의 역사』(공역, 2016), 저서로 『장치에 맞서다: 한국 동시대 사진 비평』(2021)이 있다.

“사진 미디어를 이해하는 것은, 낡은 것이건 새로운 것이건 다른 모든 미디어와의 관련을 포착하지 않는 한 전혀 불가능하다.”[1] 복잡한 미디어(media) 세계의 구조를 정리하며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지나가듯 뱉은 사진에 관한 이 규정은 (다른 맥락이지만) 오늘날 예술 매체(mediums)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준다.[2] 최초의 기술 영상으로서 사진은 객관적 사실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회화와 차별화되며 고유한 위치를 점하였고, 영화와 비디오아트라는 ‘무빙이미지’로의 확장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 사진은 비교적 짧은 시기, 협소한 범위에서 그 자체 매체의 본성을 탐구하는 모더니즘 외에는 대체로 다른 여러 예술 매체들과의 관련성 아래 논의되거나 기록 또는 자료로서의 가치, 대중문화 내에서의 보편적 활용에 논의가 편중되는 경향이 강했다. 한편, 이러한 사진의 ‘중간적(middle)’[3] 위치는 이미지 세계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동하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았다.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한 이미지의 내재적 변용 가능성으로 인해 사진이 가진 ‘시각적 진실’에 대한 보장이 무너졌고 휴대폰과 인터넷에 의해 누구나 손쉽게 사진을 찍고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범람하는 이미지들 가운데 예술 매체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사진 이후의 사진’을 논해야 할 때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사진은 본래 매체가 지니는 중간적 속성, 그리고 디지털 이미지로의 변환으로 인해 동시대미술과 관련된 이른바 ‘포스트’ 논의에서 고유한 위치에 놓인다. 확실하고 투명하고 단일한 것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하여 사진은 ‘픽쳐’ 개념과 함께 중요한 예술 매체가 되었다.[4] 이후 디지털 기술에 의한 뉴미디어 아트의 등장으로 동시대미술은 ‘포스트-미디엄’과 ‘포스트-미디어’로 논의가 분화되었다. 그러나 사진은 그 중간적 속성 때문에 관점에 따라 양쪽 모두에 속하거나 둘 다를 벗어나는 결과를 맞았다.[5] 비디오 이후 무빙이미지를 가능케 한 예술 매체로서는 포스트-미디엄에, 문자 시대에서 벗어난 기술 영상의 시작점으로서는 포스트-미디어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진에 관한 보다 효과적인 논의를 위해 범위를 좁힐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초 윌리엄 J. 미첼(William J. Mitchell)은 아날로그 사진과 디지털 이미지의 물리적 차이가 근본적이며 그것이 곧 문화적으로도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임을 주장하며 ‘포스트-포토그래피’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6] 미첼이 포스트-포토그래피로서 강조한 전유, 변형, 재가공, 재조합 등에 의해 컴퓨터로 만들어진 디지털 이미지의 특징은 “분열과 불확실성, 그리고 이질적인 것에 특권을 부여하고 완성된 예술 객체보다 과정이나 수행을 강조하는 매체”로서의 속성이다.[7] 이는 어렵지 않게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결된다. 디지털 매체의 등장으로 인한 예술의 변화를 다룬 매체미학자 노르베르트 볼츠(Norbert Bolz) 역시 디지털 이미지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방법론이 곧 이질적인 것과 유희하고 동일성이 분열된 포스트모던의 특징과 연결되며 즉 “우연의 세계이자 많은 가능한 세계들 중 하나”임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결국 예술이 그러한 예기치 못한 비개연적인 카오스로부터 탄생한다고 보았다.[8]

그런 한편 2000년대 후반 등장한 포스트-인터넷[9] 개념은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서 중요한 논점을 제공한다. 그것은 인터넷을 단순한 기술로 바라보기보다 문화 전반에 미치는 영향으로 주목하기를 제안하고 이미지가 매체 자체에 얽매이지 않은 채 동시대 디지털 시각문화 전반에서 보다 자유로운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특히 포스트-인터넷은 사진 매체와 관련해 인터넷을 통해 이미지가 생산되고 교환되는 가운데 가치가 발생하는 이미지의 ‘순환’ 개념을 강조한다. 이미지가 업로드 되고 원하는 사람 누구나 언제든 해당 이미지에 접근해 그것을 저장하고 변용하여 다시 공유하는 순환의 속도 및 범위가 확대되는 현상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발터 벤야민이 그리도 바랐던 이미지의 ‘민주적 가치’의 보다 나은 실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포스트-인터넷아트의 핵심은 공유의 차원을 온라인 밖의 세계로까지 확대해 이미지가 실제로 어떻게 제시되는가를 고민하는 것에 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 시각문화가 전통적인 매체와 어떤 관련을 맺으며 기존의 예술 영역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Super-fine: 가벼운 사진술》은 이러한 ‘포스트 담론’의 맥락에서 오늘날 사진의 확대된 영역을 논할 필요성을 제시한다. 별 다른 관련성 없어 보이는 9명(팀)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 전시는 동시대미술에서 사진이 할 수 있는 여러 양상의 예술적 시도를 제시하고 사진 이후의 사진을 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작품에 대한 구체적 설명과 함께 그 특징을 몇 가지 논점으로 압축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가벼운 사진술’이라는 부제대로 실제 사진이 가벼워졌다. 거대한 크기와 육중한 무게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대형사진의 압박에서 벗어나 오늘날 미술 전시장 안에서 사진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보여주기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디지털 기술은 카메라와 프린트 양면에서 1990년대 유형학을 비롯한 대형사진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일상에서 이미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변형하며 인터넷을 통해 순환시킴으로써 이미지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지도록 만들었다. 특히 그러한 디지털 시대 시각문화를 공유하는 포스트-인터넷 세대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이강혁은 사진의 본성에 충실하면서도 가장 가벼운 사진을 보여준다. 그의 사진은 본인 주변의 일상을 찍는 전형적인 스냅사진의 특징을 지닌다. 낮은 감도의 필름과 노출의 제약으로 입자가 두드러지고 얕은 심도로 인해 초점이 맞은 부분 외엔 대체로 화면이 흐릿하다. 특히 많은 사진이 밤의 도시를 배경으로 주변의 인공조명 불빛을 모아 어둠 가운데 필터로 거른 듯 한 색을 부각하거나 대상 바로 앞에서 터뜨린 플래시로 과도하게 밝게 만든 부분을 어두움과 대비시켜 이상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러한 사진의 형식은 소재와 결합하여 증폭된 효과를 낸다. 을지로와 이태원 같은 서울의 오래된 거리나 인천 공단 주택가를 배경으로 촬영한 비주류 감성의 서브컬처적 대상이 특유의 형식과 만나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스냅사진에 맞게 무겁지 않은 설치 방식을 사용한다. 이는 마음에 드는 포스터나 프린트를 인터넷에서 구매한 기성 액자에 넣어 벽에 걸거나 종이 그대로 자석이나 마스킹 테이프를 사용해 붙이는 행위가 ‘일상의 미학’으로 생활화된 세대의 특징을 반영한다.

가벼운 사진의 특징은 이미지의 저자성과도 관련된다. ‘자신의 사진을 찍는다(Take my own pictures)’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스스로 찍은 이미지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저장소 안의 이미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미지 대량 생산 시대를 살고 있다. ‘찍지 않는 사진(found photography)’은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상을 얻어내는 20세기 초 포토그램에서부터 존재했던 개념이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이미지의 공유와 전유라는 맥락에서 그러한 특징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이라는 신화에 대한 믿음과 유일성을 지닌 주제라는 신화에 대한 믿음을 타파하고 ‘해체’하는”[10]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속성과 궤를 같이 한다. 이 전시에서 오가영과 기슬기는 본인의 이미지 저장소에서 길어 올린 이미지들을 변형하여 실제 전시 공간에 제시하는 방식을 고민하였다. 두 사람의 작업은 외형상 크게 달라 보이지만 이처럼 포스트-포토그래피와 포스트-인터넷을 가로지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오가영은 일상에서 숨을 쉬듯 채집한 무수히 많은 디지털 이미지의 파편들을 포토샵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합하고, 그렇게 만든 새로운 이미지를 종이에 프린트한 뒤 다른 여러 재료를 동원해 재가공하여 실제 공간 안에서 제시한다. 3차원 공간을 2차원 평면으로 전환하는 것이 사진이라면 작가는 그것을 다시 3차원 공간으로 어떻게 끌어낼지 고민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사진의 표면을 보호하는 부차적 재료인 유리를 프린트와 결합하고 경첩과 바퀴를 이용해 공간을 가로지르도록 설치했다. 포토샵에서 이미 상당한 변형을 거친 이미지의 프린트를 오려내어 유리에 붙이거나 바닥으로 흘러내리도록 했고 프린트와 겹친 유리 위에 또 다른 형상을 그리거나 마스킹 테이프를 더했다. <세미 프레임 Semi-frame>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때 유리는 더 이상 사진을 보호하는 액자의 일부분이 아니라 프린트와 하나 되어 그것들을 지탱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매체의 일부분으로 작동한다. 한편 기슬기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스토리지 이미지를 사용해 작업 과정 중 컴퓨터 화면에서 일어날 법한 모습을 실제 전시 공간에 적용했다. 액자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종이에 출력한 이미지들을 온전히 벽면에 붙이지 않고 같은 이미지를 여러 장 출력해 공간의 특성을 이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배치한 것이다. 포토샵 화면에 수십 개의 레이어가 뜨듯 같은 이미지를 겹쳐 떠오르게 하거나 두 개의 다른 이미지를 기둥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반복해서 배열해 새로운 패턴이 되도록 하고, 여러 장의 동일한 이미지를 같은 높이의 기둥에 반복적으로 붙임으로써 전시장 안에서 사진의 원근법을 다시 보게 하거나 한 장의 사진을 벽의 모서리에 둘러 붙임으로써 관객이 보는 위치에 따라 이미지를 다르게 경험하고 지각의 혼돈이 일어나도록 유도하였다.

이와 같은 사진 배치에 대한 강조는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의 관계나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후기구조주의 및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연장선에서, 의미의 불확정성을 사진작업의 중요한 주제로 삼아 온 정희승은 이번 전시에서 <카피어 Copier> 연작의 일부를 통해 원본(original)과 복제(reproduction)의 관계를 전면에 내세웠다. 복사기(copier)를 찍은 사진을 다시 복사한 이미지와 (입체물 복사기에 해당하는) 3D 프린터로 출력한 부처를 찍은 이미지를 각각 다섯 장씩 인화하여 나란히 걸었다. 다섯 장의 사진은 동일한 이미지의 복제이지만 각각 에디션이 없는 원본이기도 하다. 이는 리차드 프린스(Richard Prince)가 “무언가를 새로 하는 것은 다시 하는 것에 불과”[11] 하다며 광고사진의 일부분을 ‘다시 사진 찍기(rephotography)’를 통해 전시장에서 재맥락화한 의도와 같다. 나아가 복사기와 부처가 이에 대한 의미를 강화한다. 복사기는 실크스크린, 인쇄, 사진 등과 함께 앤디 워홀(Andy Warhol)이 복제와 관련해 탐구한 도구 중 하나였다. 당시 예술의 우월한 위치를 끌어내리고자 했던 워홀이 복사기에 직접 얼굴을 대고 버튼을 눌렀던 <Self-portrait>(1969)처럼[12], 정희승은 상이 번진 복사기와 출력이 잘못된 듯 우스꽝스럽게 변형된 부처 이미지를 통해 예술과 종교의 성스러운 지위를 ‘원본성(originality)’과 함께 무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더 카피 트래블러스(THE COPY TRAVELERS)[13] 역시 복사기를 중요한 장치로 이용한다. 이들에게 복사기는 복제에 대한 긍정은 물론 이미지의 변형 및 재가공을 위한 도구로 쓰인다. 복사기 위에 사진, 인쇄물, 포장지 등의 평면 이미지뿐 아니라 주변의 다양한 사물을 함께 올려놓고 광원이 지나가는 동안 힘을 주거나 기울이는 등 움직임을 더 하는 이들의 ‘카피서사이즈(copyxercise)’는 계획과 우연이 결합된 ‘복제적 창작’이다. 원천이 다를 뿐 아니라 물질성과 차원이 다른 (사진을 포함한) 여러 오브제를 하나로 결합하는 가운데 작가들 스스로도 이미지를 통제할 수 없다. 그것을 보는 관객들은 개별 이미지 사이의 관련성을 짐작하기를 포기하고 완성된 결과물로서의 이미지에 대한 현재의 지각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이질적인 것의 자유로운 결합은 동시대미술에서 매체의 혼성적 특징과 맥락이 닿아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매체에 대한 모더니즘적 강박을 벗어나 여러 매체를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것처럼, 포스트-포토그래피 역시 사진 이외의 다른 매체와의 관계성 혹은 확장성을 중요한 특징으로 한다. 특히 정지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이미지로 이행하거나 그와 접목하는 것은 가장 먼저 고려되는 방식이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정연두의 영상 작업은 매체적 특징이 적절한 주제와 만나며 그러한 ‘혼종성’을 잘 보여준다. 수 천 장의 디지털 사진을 이어 붙여 거대한 파노라마로 만들고 서서히 수평으로 움직이도록 한 작품들은 정지이미지로부터 무빙이미지로 만들어졌지만, 순간적으로 멈춘 사람들이나 강한 조명으로부터 생성된 과도한 그림자와 같은 사진의 특징이 남아있고 움직인다는 사실로 인해 둘 중 하나의 매체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것은 마치 회화와 사진 사이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했던 19세기 디오라마를 연상케 한다. 거기에 더해 사운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컨대 뉴욕의 에스닉타운 여섯 곳―인도, 이탈리아, 중국, 한국, 멕시코, 러시아의 거리를 이어 붙인 <식스 포인츠 Six Points>(2010)에서 영어의 억양과 발음이 조금씩 다른 해당 국가 출신 사람들의 내레이션이 배경 간판들과 연동되어 다민족 사회로서 미국의 혼종적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다.

디지털이 중심이 되는 작업에서 복합적 매체의 성격은 보다 강해진다. 그리고 그러한 특징은 수용자에게 있어 시각이나 청각과 같이 분화된 지각이 아닌 공감각적 지각을 유발한다. 볼츠는 디지털 시대 예술은 작품의 분석보다 수용자의 체험과 그들의 ‘감성적 지각(aisthesis)’이 중심이 되는 미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맞았다고 역설한다.[14] 이 전시에서 유일한 프로젝션 디지털 영상인 구기정의 <물은 투명하다 Water is transparent>는 그러한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은 고해상도 카메라, 특수 렌즈, 플래시, 3D 프로그램 등 여러 디지털 기술을 동원해 물의 다양한 속성을 형상화한 영상이다. 한 줌의 물은 투명하지만 일정 정도 부피 이상의 물은 투명하지 않다. 또한 강이나 바다의 물결을 떨어져서 바라보면 일렁거림과 함께 그 표면을 관찰할 수 있지만 물결에 휩싸이면 더 이상 표면을 볼 수 없으며 깊은 물속에서는 그 무게와 온도를 느낄 뿐 물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작가는 출렁거리는 물 표면에 카메라가 초점거리를 맞출 때 일어나는 투명도(opacity)의 차이로부터 착안하여 다양한 물의 형상을 표현하였다. 그것은 카메라의 한계를 말하는 동시에 카메라를 보완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상징하는 의미에서의 (각 개체가 포개지는 부분의) 포토샵의 투명도에 관한 언급이기도 하다. 작가는 3D를 포함해 디지털 기술이 카메라의 시각에 국한된 감각을 보완하여 촉각과 그 이상의 공감각으로 확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실재하는 물의 재현 이미지가 아니라 작가가 파악한 물의 속성과 감각을 증대시켜 새롭게 만들어낸 ‘증강된 자연’인 것이다.

이처럼 포스트-포토그래피에서 수용자의 지각의 문제는 핵심적인 논제다. 더 이상 이미지는 어떠한 대상을 묘사하거나 재현하지 않으며, 지시대상이 해체되면서 이미지 자체가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전통적 의미의 사진이 무엇을 찍었는가, 즉 그 지시대상이 무엇이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 집요하게 캐묻는 것과 달리 포스트-포토그래피는 결과물로서 이미지가 절대적 기준이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이 보는 세계와 카메라가 보는 세계가 다른 것처럼, 디지털 이미지는 또 다른 세계를 갖는 것이다. 카메라에 의한 ‘실재감’에 기준을 맞추려 했던 초창기 디지털 이미지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미디어 이론가 레브 마노비치는 “디지털 이미지는 전통적 사진의 시각적 사실주의보다 열등하지 않다. 완벽하게 사실적이다. 오히려 너무 사실적이다”[15]고 말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이미지이며 새로운 감각을 부여한다.

이 전시에서 김경태와 최용준은 바로 그러한 디지털 이미지 특유의 감각을 드러내는 ‘완전히 납작한’ 정지-평면-이미지를 보여준다. 사진은 카메라에 의해 기계적 원근법을 적용받음으로써 투시를 가지고 빛에 의한 그림자로 완전히 평면적일 수 없으며 그러한 특징들로 인해 실재감을 만든다. 그러한 실재감을 부여하는 데 기여하는 것 중 하나가 심도다. 카메라 렌즈는 한 곳에 초점을 맞추고 조리개 값으로 전체 화면의 심도를 조절하지만 일정 정도의 조리개 값을 넘어서면 오히려 전체적으로 상이 흐려지기 때문에 완전히 심도를 거슬러 모든 영역에 초점이 맞는 완전히 평평하고 선명한 화면을 얻을 수는 없다. 이에 최근 작가들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여러 차례 셔터를 눌러 각기 다른 부분에 초점이 맞은 레이어를 한 장의 이미지로 쌓아올리는 포커스 스태킹(focus stacking) 기법을 사용한다.[16] 김경태는 접사촬영에서의 포커스 스태킹을 통해 대상의 물성과 질감을 최대치로 끌어 올린다. 대상의 표면을 극도로 가까이에서 촬영함에도 화면 전체에 초점이 맞아 투시는 사라지고 질감은 극대화되어 육안으로 지각할 때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때 실제 대상과 사진 이미지 사이의 규모의 차이가 클수록 효과는 배가된다. 작은 돌멩이를 그 안의 광물까지 자세히 드러나도록 찍거나 책을 마치 건축물처럼 구조를 강조하여 배치하고 그 모서리를 종이의 결까지 보이도록 가까이서 찍은 사진이 벽면을 채울 정도의 대형 프린트로 전시되었을 때처럼 말이다. 한편 최용준은 도시의 건물 사진을 유사한 방식으로 촬영한다. 화면에 들어오는 모든 영역에 초점을 맞추어 풍경의 원근을 없애고 거리감을 제거하는 것이다. 최용준의 건물사진이 가진 독특한 조형성은 촬영 당시 카메라의 시점과 앵글, 프레이밍 등에서 비롯되지만 촬영 전후의 과정에도 큰 비중이 있다. 작가는 위성지도와 스트리트 뷰를 통해 도시 경관을 먼저 탐색하여 화면을 계획한 뒤 해당 장소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촬영을 시도한다. 그의 사진 중 건물 전체가 아닌 일부분이 잘려 있거나 허공에서 아래로 바라 본 앵글이 눈에 자주 띄는 것은 그런 이유다. 그리고 포토샵을 통해 초점이 다른 여러 장의 이미지를 하나로 합치고 색의 명도 및 채도를 조절해 그래픽적인 효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우리에게 또 다른 세계를 가져다준다. 더 이상 그것은 편리하고 놀라운 신기술 자체가 아니며 예술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 스며들어 우리의 삶과 하나 되어 작동한다. 특히 디지털 시대 예술 영역에서는 더 이상 조작이 특별하거나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조작의 다른 말은 구성이며 자신의 생각과 개념을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도록 돕는 형식적 방법인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사진을 포함한 시각예술 작가들에게 선택과 표현의 자유를 부여한다. 포스트-포토그래피 시대에는 시각적 진실의 의미가 변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포스트’ 담론은 그 접두사가 붙은 원 단어를 다시 고찰하게 하고 그로 인해 더 많은 것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포스트-포토그래피에 관한 논의는 사진을 더 잘 이해하게 하고 사진의 범위와 역량을 더욱 확장시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진 그 자체가 지닌 중간적 속성으로 인해 사진 ‘매체’에 대한 고찰은 결국 시각문화 내 보편적 ‘미디어’에 대한 논의로 이어질 수 있다. 사진 이후의 사진에 대한 논의가 보다 넓어지고 깊어져야 할 때가 왔다.

 

[1]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1964), 박정규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1997, 231쪽.

[2] 원래 ‘미디어(media)’는 도구나 수단을 의미하는 영어 ‘미디엄(medium)’의 복수 형태로서 일반적으로 대중 매체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지칭한다. 뉴미디어 등장 이후 예술 영역에서는 이와 구분하기 위해 예술의 재료 및 장르의 의미에서 복수 형태 ‘미디엄(mediums)’을 사용한다. 상용화된 한국어는 ‘매체’이기에 이 글에서는 미디엄을 예술 매체와 병행하여 사용한다.

[3] 여기서 ‘중간’의 의미는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중간예술(Un art moyen)’을 염두에 둔 것이다. 부르디외는 사진을 고급예술과 대중문화 사이에 위치한 완전히 공인되지 않은 예술이라는 의미에서 중간예술이라고 보았다.

[4]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 더글라스 크림프(Douglas Crimp)가 기획한 전시 《픽쳐스(Pictures)》(1977) 이후 사진, 비디오, 회화, 판화, 드로잉 등 2차원 표면의 이미지를 ‘픽쳐’로 통칭하면서 사진은 동시대 예술 매체 중 하나로 적극 논의되었다.

[5] 포스트-미디엄 담론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북해로의 여행: 포스트-미디엄 조건 시대의 예술(A Voyage on the North Sea: Art in the Age of the Post-Medium Condition)』(Thames&Hudson, 2000)을 비롯해 미국 미술이론가들을 중심으로 설치 위주의 현대미술 경향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매체 특정성에 대한 회복을 골자로 전개되었다. 반면 포스트-미디어 담론은 이러한 현대미술의 논의에 대한 반감과 함께 디지털 미디어의 보편적 매체성에 주목하는 피터 바이벨(Peter Weibel)과 레브 마노비치(Lev Manovich) 등의 뉴미디어 이론가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6] William J. Mitchell, The Reconfigured Eye: Visual Truth in the Post-Photographic era, Cambridge: MIT Press, 1992.

[7] Ibid., pp. 7-8.

[8] 노르베르트 볼츠, 『컨트롤된 카오스: 휴머니즘에서 뉴미디어의 세계로』(1995), 윤종석 역, 문학과지성사, 2000, 358-365쪽.

[9] 포스트-인터넷은 미디어아트 기획자이자 작가인 마리사 올슨(Marisa Olson)이 처음 사용한 용어다. 올슨은 2008년 예술 및 기술 관련 웹사이트 ‘we-make-money-not-art.com’과 진행한 인터뷰(2008.3.28.)에서 관련된 내용을 처음 언급하였다. (https://we-make-money-not-art.com/how_does_one_become_marisa/ 검색일: 2021.11.10.) 이어서 같은 해 웹사이트 ‘Words Without Pictures’에 발표한 글 「분실물 유실: 디지털 시각 문화 내 이미지의 순환(Lost Not Found: The Circulation of Images in Digital Visual Culture)」(2008.9.18.)에서 포스트-인터넷에 관한 사례와 자신의 생각을 전개하였다. 해당 웹사이트는 샬롯 코튼의 기획으로 사진 관련 예술가, 비평가, 큐레이터 등 다수의 사람들이 도판 없이 차례로 올린 글이 게재되었고 동명의 책 『그림 없는 말(Words Without Pictures)』(Aperture, 2010)로 발간되었다.

[10] 앤디 그룬버그, 「사진과 포스트모더니즘」(1987), 『사진과 텍스트』, 김우룡 엮음, 눈빛, 2017, 222쪽.

[11] Richard Prince, Why I go to the movies alone, New York: Tantam Press, 1983, p. 63. 앤디 그룬버그, 「사진과 포스트모더니즘」(1987), 『사진과 텍스트』, 김우룡 엮음, 눈빛, 2017, 227쪽 재인용.

[12] 앤디 워홀은 스쿨 오브 비주얼아트 교내 매점에 설치된 복사기 포토스타트(Photostat)를 사용하였다. 당시 발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복사(photocopy)는 전기로 충전되는 잉크(토너), 약간의 열, 사진적 프로세스가 결합된 기술로 등사기(mimeograph)의 복잡한 과정에 비해 매우 간단한 것으로 사무실 환경을 바꿨을 뿐 아니라 이미지와 관련해서 사진술 이래 가장 획기적인 발명으로 칭해졌다.

[13] 카노 슌스케(Shunsuke Kano), 사코 텟페이(Teppei Sako), 우에다 야야(Yaya Ueda) 세 사람이 2014년 결성한 그룹으로 교토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복사기, 스캐너, 카메라 등을 사용해 ‘복제’의 가능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있다. 국내에는 《THE SCRAP 2018》(문화역 서울 284, 2018)과 2018 서울사진축제특별전 《Walking, Jumping, Speaking, Writing》(SeMA창고, 2018)에 참여한 바 있다.

[14] 노르베르트 볼츠,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들』(1995), 윤종석 역, 문학과지성사, 2000.

[15] 레브 마노비치, 「디지털 사진의 역설」(1995), 『사진과 텍스트』, 김우룡 엮음, 눈빛, 2017, 280쪽.

[16] 휴대폰 카메라에 여러 개의 렌즈를 장착해 한 번의 촬영 버튼으로 노출 값과 초점이 다른 여러 장의 이미지를 동시에 얻어낸 뒤 픽셀 단위에서 병합해 한 장의 이미지로 만드는 딥 퓨전(Deep Fusion)과 같은 기술이 이미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