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불안에 관한 짧은 노트> 이연숙(아그라파 소사이어티)

Fortune Telling: 운명상담소 연계 리서치

이연숙(리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쓰고 비교문학을 공부한다. 현재 기획/출판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서 웹진 ‘세미나’를 발간하고 있다.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하고 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hotleve를 운영한다.


아그라파 소사이어티
아그라파 소사이어티 Agrafa Society는 김진주, 이연숙, 이진실로 구성된 기획 & 출판 콜렉티브다. 아그라파Agrafa는 ‘문맹의’ 또는 ‘문자 체계가 없는’을 뜻하는 스페인어 형용사의 여성형으로, 아그라파 소사이어티는 문법 없이도 가능한 쓰기의 사회를 꿈꾼다. 리서치 기반의 프로젝트에 주목하여 시각 문화와 동시대 예술에서의 의미심장한 신호를 포착하고자 하는 활동으로서 웹저널 〈SEMINAR〉를 발간하고 있다. www.zineseminar.com

오늘날 우리 시대의 정서는 흔히 ‘불안’으로 일컬어진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불안은, 존재의 실존적인 차원에서 느끼는 공포라기보다, 제약 없는 자유와 선택 앞에서 마비되는 공황 증상에 가까울 것이다. 도처에 깔린 자기계발서와 상담 치료, 기업의 홍보 전략과 공공 정책의 캠페인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우리가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우리 자신을 교정하고 개선할 수 있다고 속삭인다. 이들의 다정한 협박과 음흉한 회유 속에서 우리는 무한하게 펼쳐질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이상화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언뜻 훔쳐본다. 어쩌면 살짝 한 발자국 내딛는 것만으로 우리는 기회라는 이름의 도박에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제공하는 유혹적인 기회, 심지어는 ‘혁명적인’ 기회가 질릴 만큼 많다는 것이다. 레나타 살레츨은 <불안들>의 한 장에서 키에르케고르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자유로운 주체는 바로 불확정성, 즉 자유에 수반되는 ‘가능성의 가능성’ 때문에 불안하다. (…) 그러니까 나는 유일한 결정권자이고 내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안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과 연관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불안은 흔히 심연을 내려다볼 때 드는 느낌과 같다.”[1]

요컨대 생필품을 구매하는 일과 같은 가장 일상적인 생활의 영역에서조차, 우리는 지금까지의 내 삶을 따분하고 지루한 것으로 묘사하는 대기업의 상품 홍보 문구에서 ‘심연’을 본다. 이들은 자기네 상품이 단돈 몇만 원에 우리를 그러한 삶에서 구제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삶의 질을 누리게 해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 지금 내 앞에 놓인 수백 가지의 프라이팬들 중 무엇을 선택해야 내 삶이 바뀔 것인가, 또는 바뀌지 않을 것인가? 물론 우리는 ‘가성비’를 따져 무엇이든 고를 수 있지만, 좀 더 우리의 취향이 반영되는 상품들 앞에서는 짐짓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소비 지상주의 아래서 ‘나의 취향은 곧 나 자신’이고, 가능한 유일한 주체는 소비 행위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나이키나 스타벅스와 같은 다국적기업들이 상품 자체가 아니라 (소비자가 동일시할 수 있는) 기업의 이미지와 (소비자들의 집단적 동일시로부터 가능한) 소속감을 판매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요컨대 나이키는 그들의 캐치프레이즈인 ‘저스트 두 잇 JUST DO IT’과 더불어 종종 상징적인 여성과 성소수자 인물들을 내세운 광고를 촬영하는데, 이는 소비자들에게 나이키라는 기업이 평등, 다양성과 같이 정치적으로 올바른(건전한) 가치들을 지향한다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좋든 싫든 이러한 인상에 접속된 소비자는 나이키의 상품을 구매하는 행위를 통해 사회적으로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라 믿게 된다. 마찬가지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이미지를 고수하는 기업들 역시 그들의 타겟이 되는 소비자들이 동일시할만한 매혹적인 자아 이미지의 모델을 제공한다. 여기서 쉽게 말해 ‘그 브랜드를 입으면 나도 그렇게 보일 거야’ 같은 환상이 작동한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엇이 되고 싶다면, 바로 그 무엇을 구매하면 된다.

이렇듯 우리는 소비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명령이자 생존 전략인 이른바 자기-재제작에 쉽게 복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삶을 작품화(상품화)하라는 ‘경험 경제’의 문화 자본주의의 요구에 순응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삶’만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애초에 내가 욕망하는 ‘나의 삶’이란 곧 다른 사람들의 욕망의 거울일 뿐이기에, 나 자신이 되려는 시도는 결코 알 수 없는 대타자의 욕망 앞에서 반복적으로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아의 이상화된 상상적 이미지에 항상 ‘다른 누군가’가 개입해있는 한, 우리는 어떤 선택 앞에서도 불만족스러운 ‘이게 아닌데’의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레나타 살레츨은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가 이러한 좌절에 뒤따르는 불안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해결책들’ 역시 제공함으로써 ‘불안에 기생하는’ 특정한 종류의 경제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 편으로는 불안이 주체의 행복을 위협하는 장애물로 문제화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을 제거하고 해소할 (불가능한) 방법이 상품화되고 판매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듯 새로운 종류의 불안이 계속해서 생산되고 관리된다는 것이지, 불안 자체가 아니다. 이러한 관점은 자기계발과 자아실현의 ‘고통스러운’ 내러티브가 어떻게 페미니스트, 심리학자, 보험회사, 제약회사에 이르는 다양한 작용 주체들에게 상품으로서 개발되고 판촉 되었는지 분석한 에바 일루즈의 <감정자본주의>를 연상시킨다.

프로이트에게 불안은 거세(혹은 죽음)이라는 상실의 위협에 대응하는 반응이고, 라캉에게 불안은 상실의 부재(상징계의 붕괴)에 대한 반응이라고 요약할 때, 둘 모두에게 불안은 어쨌든 인간 존재의 본래적이고 근원적인 정서를 의미한다. 따라서 라캉을 참조해 레나타 살레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주체에게 가장 불안을 유발하는 것은 여전히 주체와 대타자의 관계라고 말하고자 한다. 대타자는 주체에게 늘 ‘불안을 유발하는데’ 그것은 주체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특히 ‘대타자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주체가 대타자의 존재 유무와 대타자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여전히 불안해한다는 사실은 사회가 정신병화되지 않았다는 징후이다.”[2] 말하자면 불안의 경험이란 주체가 인간으로서 사회라는 적대와 ‘씨름하는 징후’라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면서, 동시에 무한한 선택이라는 (기만적) 자유 앞에 놓인 주체의 불안이라는 주제에 반드시 덧붙여야 할 또 다른 종류의 불안을 묘사하고자 한다. 내가 알기로 지금 말하려는 이 불안은, 특히 ‘프레카리아트’라고 불리는 불안정 노동자들의 주된 정서적 양식이지만, 어떠한 자본주의도 그것의 원인을 제거하거나 해소할 것을 촉구하지 않았다.

만약 불안을 ‘기대적 감정’, 즉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대한 반응이라고 가정한다면, 새로운 노동 계급인 이들의 시간성은 과거나 현재보다는 미래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들은 잠들기 직전까지 당장 내일 내야 할 월세와 이번 달의 일자리와 몇 달 후의 이사와 주거를 속수무책으로 걱정하며 불안해한다. 로렌 벌렌트의 말을 빌리자면 이들 계급에게 불안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잔잔히 흐르는 ‘백색소음 기계’, 일종의 ‘리듬’이 된 지 오래다. 이들은 수입과 직업, 주거와 사회적 관계 모두 만성적으로 불안정한 상태 속에 있다. 단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뿐인 서스펜스적인 불안의 시간성은, 아마도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가장 뛰어나게 묘사된다. <로제타>(1999)는 영화의 조용한 ‘현실 고발’에 힘입어 그 제목을 딴 청년실업대책이 마련되기도 한 작품으로, 도시 외곽의 진흙밭에 위치한 트레일러에서 알콜 중독자인 어머니와 함께 사는 여자아이 ‘로제타’가 주인공이다. 첫 장면에서 관객은 ‘로제타’가 계약 기간 종료로 인해 실직했음을 알게 된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출근하고 돈을 버는 것뿐이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소망으로 밝혀진다. 다른 다르덴 형제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영화적 공간 속에서 인물들이 재생하는 음악 외에 다른 배경음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카메라는 핸드헬드 기법으로 ‘로제타’의 등 뒤를 집요하게 쫓는다. 관객은 성큼성큼 걷는 ‘로제타’의 뒷모습을 초조하게 따라가면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역설적으로 낙관적인 희망만큼은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되는 비극을 본다. 이때의 비극이란 죽지도 못하고 그저 살아지는 시공간의 장르를 의미한다. 로렌 벌렌트는 <잔혹한 낙관주의>의 한 장에서 <로제타>를 (상황적 코미디, 즉 시트콤과 반대되는) ‘상황적 비극 situation tragedy’이라는 장르에 위치시킨다. “상황적 비극이라는 새로운 혼합 장르는 개인들이 그들의 결점을 계속해서 에피소드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진 장르다. 배우고 변화하고 안도하는 건 물론이요 더 나아지는 것은 고사하고 죽음조차 불가능해진 장르, 즉 비극과 상황적 코미디가 결합한 장르이다.”[3] 그녀에 따르면 상황적 비극의 시공간은 ‘사건 event’처럼 극적인 전과 후의 단절로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리듬, 분위기, 제스처, 느낌 속에서 감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상황 situation’에 가깝다. 이 같은 분석은 <로제타>가 묘사하는 느릿하고 조용한 질식의 경험을 잘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 시대와 계급에 만성화된 불안의 표면을 파고들 수 있도록 한다.

사실 우리는 불안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신질환이 전염병처럼 돌고 있는 기이한 시대에 살고 있다.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의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에 따르면, 프레카리아트의 외부에 위치한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조건들이 붕괴한 만큼이나 이들의 정신 역시 붕괴해 있는데, 이는 이미 “사회 무대의 중앙에서 폭발”[4] 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는 오늘날 네트워크 경제에서 강조되는 유연성은 자본이 노동자의 육체를 독점하는 대신, 파편화되어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노동자의 시간을 조각내어 구매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때 노동자는 인간 개인이 아니라 언어적 소통과 같은 최소한의 인지적 능력만을 갖춘 대체 가능한 기계로 환원된다. 그/녀의 시간과 정신은 분절되고 재조합될 수 있는 단위로 재편성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생존하고 싶다면 경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고, 경쟁적인 사람이 되려면 네트워크에 접속해 끊임없이 증가하는 막대한 양의 데이터 덩어리를 계속 수신, 처리해야”[5] 하기 때문에, 곧 불안은 물론이고 주의력 장애와 정서 장애, 우울, 공황, 고독 등이 개별적인 증상처럼 보이는 병리적 증상들이 한데 뒤얽혀 출현하게 된다. 이것이 과거 육체노동에서는 비교적 부차적인 문제였던 정신병리가, 노동 과정에서 정신적, 리비도적 에너지를 장기각 집중 투여할 것을 요구하는 인지노동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문제가 된 까닭이다. 이때 정신병리는 기호(인지) 자본주의의 속도가 인간의 정신과 신체에 미친 피할 수 없는 결과로서 드러난다.

프랑코 “비포” 베라르티의 이러한 분석은 마크 피셔가 주장하듯, 정신질환이 결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을 시사한다.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통치 아래서 경제적, 정치적 요인은 (어린 시절의 불행한 사건 만큼이나) 기분 장애를 포함한 정신질환과 분명한 관계를 맺는다. 그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훨씬 더 평범한 질환들의 정치화다. 정말이지 쟁점은 질환들의 바로 그 평범함이다. (…) 심리적 고통을 해결하는 문제를 개인들 스스로가 책임지도록 하는 대신, 다시 말해 지난 30년간 진행된 광범위한 스트레스의 개인화를 수용하는 대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필요가 있다. 그토록 많은 사람, 특히 그토록 많은 청년들이 아프다는 사실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게 되었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신 건강 질환’이 유행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사회 체계이기는커녕 내재적으로 고장이 나 있으며, 그것이 잘 작동하는 듯이 보이도록 만드는 비용이 아주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6] 그의 관점에서 불안 장애를 포함한 각종 정신적인 ‘고장’들은, 문화적 현상이나 정치적 범주가 아니라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무자비한 세계에 대한 물리적인 반응이다. 점점 더 많은 우리는 가속화되는 자본주의의 속도 속에서 우리의 증상들이 더 이상 비유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우리가 완전히 미치거나 거의 죽지는 않은 채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이제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이 가능할까?

 

[1] 레나타 살레츨, 박광호 역, <불안들>, 후마니타스, 110-111p.
[2] 레나타 살레츨, 박광호 역, <불안들>, 후마니타스, 269-271p.
[3] Lauren Berlant, Cruel Optimism, Duke University Press, 2011, 185p.
[4]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정유리 역,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 87p.
[5]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정유리 역,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 87p.

[6] 마크 피셔, 박진철 역, “자본주의 리얼리즘”, 2018, POKE2 기준 교보문고 E-BOOK 원본 크기 열람, 21%.

*이 에세이는 일민미술관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국고 보조금을 지원받아 수행한 ‘2021년 사립박물관 미술관 온라인콘텐츠 제작지원 사업’의 결과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