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tune Telling: 운명상담소》 연계 리서치
글쓴이 차명식은 팀 길드다 소속의 필진입니다. 대학에서는 인류학을 전공했지만 그 외에도 관심을 갖고 공부한 여러 주제들로 글을 쓰고 다양한 이들과 나누어왔습니다.
고전적인 질문 하나와 함께 시작하자 – “인간의 운명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운명이란 어떤 존재가 반드시 향하게 될 방향, 목적, 쓰임새와 그를 규정하는 설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인간의 운명은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규정하는 개념으로서 그 자체로 인간-성humanity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운명이라는 단어에서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는 함의를 함께 떠올리기 마련이다.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는 세계의 흐름. 이때 인간의 운명은 거대한 세계 앞에 놓인 인간 능력의 한계와 무력함을 드러내는 장치이며, 따라서 인간 자신의 운명임에도 인간을 넘어서는 초자연적 존재에 의하여 다루어진다. 변덕스럽게 인간을 희롱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나 신께서 인간 한 명 한 명에게 정해진 쓰임새를 예비했다고 간주하는 기독교의 ‘소명Calling’ 개념이 그 예이다. 그로써 인간성의 해석과 규정은 신의 손에 맡겨진다. 오직 신만이 인간이 왜 존재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지에 대한 답을 갖는다. “인간의 운명은 무엇인가? – 오직 신께서만 그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운명을 다시 인간의 손안으로 가져오고자 하는 기획 역시 존재해왔다. 자기 존재에 대한 질문을 인간 스스로 던지며 신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이 기획은 인본주의humanism라 불렸다. 스스로 인본주의를 표방했던 사조는 수없이 많은데, 그중 철학자 장-폴-사르트르가 주창한 실존주의는 다음과 같이 인간의 운명을 정의한다. “인간의 운명은 무엇인가? –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르트르의 이 대답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숱한 비난을 받았다. 인간의 운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아무런 목적도 쓸모도 없이 이 세상에 내버려진 존재란 말인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부정하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사르트르는 그 비난에 맞서 ‘운명 없음’ 이야말로 인간의 운명이라고 주장했다. 즉, 인간에게는 정해진 운명이나 이미 결정된 쓰임새가 없기에 자기 선택과 실천에 따라 자신의 삶과 세계를 만들어나가야 하며, 그것은 오직 인간에게 허락된 특권이자 인간의 고유한 정체성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사상은 틀림없는 인간중심주의, 휴머니즘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실제로 이러한 ‘운명 없음의 운명’, ‘선택으로 삶과 세계를 만들어갈 자유’는 인간을 신이 만든 세계의 종복에서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바꾸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인간 존재를 정의하는 주요한 방식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인간은 참으로 다양한 수단을 통해 인간 운명에 대한 이 특별한 해석을 전파하고 재생산해왔다. 유사-인간의 활용 역시 그중 하나다.
인간을 위한 거울로서의 유사-인간들
유사-인간이란 인간과 매우 비슷하면서도 몇 가지 부분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에 위치한 존재들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가상의 존재인 흡혈귀는 인간과 외형적으로 유사할 뿐 아니라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어느 정도의 지능과 감정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또한 흡혈귀는 인간의 혈액을 섭취해야 살 수 있으며 낮 동안은 활동할 수 없고 그 외에도 몇 가지의 약점을 갖는다는 점에서 인간과 구분된다.
흡혈귀 외에도 의인화된 동물, 인간을 닮은 인형과 로봇, 인간의 형상을 한 인격신 등 수많은 종류의 유사-인간이 동서고금의 다양한 문화와 매체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근대 이후 등장한 휴머니즘적 서사 속에서 이들 유사-인간들은 주로 인간 정체성을 긍정하는 거울로써 활용된다. 인간이 되기를 바랐던 목각인형 피노키오에서 곤충의 눈으로 인간을 심판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존재인 인간을 질투하거나, 동경하거나, 흥미롭게 관찰하거나, 아니면 경멸하며 짓밟으려 들었다가 인간에 의해 패배한다. 인간이 되기를 갈망하는 혹은 관찰자 혹은 적대자로서 인간을 분석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우리 안의 인간성을 – 인간의 위대한 운명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삶과 세계를 선택하고 만들어나가는 인간. 다른 이들과 감정을 나누며 서로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인간. 난관에도 굴복하지 않고 도전해 세계를 정복해나가는 인간. 이 휴머니즘적 맥락 속에서는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유한성조차도 인간 존재를 긍정하는데 동원된다. (“언젠가 결국 죽을 것을 알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삶을 만들어나가는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 면에서 이 거울적 유사-인간들은 자신을 긍정하고 자기 존재에 안주하고픈 인간의 욕망을 담아내고 있다.
그다지 머지않은 미래, 한 사이보그의 의심
하지만 때로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이 유사-인간들이 인간을 드높이기 위한 거울상이 아닌 인간 정체성의 위태로움을 파헤치고 드러내는 존재로,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를 흐트러뜨려 특권적 인간 존재를 뒤흔드는 자들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중 하나가 인간과 기계가 융합된 사이보그Cyborg이며, 그 사이보그를 주인공으로 세운 <공각기동대>(1995)와 같은 작품이다.
가까운 미래를 그리는 공각기동대의 세계에서는 이미 신체 일부를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특히 작품의 주인공인 ‘소령’은 자신의 전신을 기계로 대체한 사이보그이며 뇌까지도 전자두뇌로 대체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소령’이 자신이 인간임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전자두뇌가 여전히 그녀를 인간답게 하는 요소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 자신과 타인들에 대한 기억, 생활양식, 향유하는 문화. 분명 어떤 면에서는 영혼이라 불릴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을 – 그 인간성의 프로그램을, 공각기동대의 세계에서는 ‘고스트Ghost’라 부른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 많은 부품이 필요하듯이 자신이 자신답게 살려면 아주 많은 것이 필요하지. 타인을 대하는 얼굴, 자연스러운 목소리, 눈 뜰 때 응시하는 손, 어린 시절의 기억과 미래의 예감. 그것만이 아냐. 전자두뇌가 접속할 정보와 네트워크도. 그 모든 것이 ‘나’의 일부이며 ‘나’라는 의식을 낳고…….”
– 공각기동대 中, 주인공 ‘소령’의 대사
그러나 어느 날 ‘인형사’라 불리는 인공지능 해커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인형사’는 전자두뇌를 자유롭게 열어 제치고 그 안의 ‘고스트’를 마음껏 해킹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소령은 자신이 쫓던 피의자를 심문하면서 그의 기억, 행동, 사상, 그 모든 것이 인형사의 해킹으로 인해 조작되었음을 발견한다. 여기서부터 소령의 고뇌는 시작된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전신은 부서질 때마다 얼마지 교체할 수 있는 기계의 몸, 두뇌는 전자두뇌. 두뇌 속 ‘인간으로서의 기억’은 얼마든지 조작되고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임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나를 나로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나의 존재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나라는 것을 누가 보장해주는가?
우리는 한편으로는 이러한 소령의 불안감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적지 않은 거리감을 느낀다. 어쨌거나 <공각기동대>는 가상의 미래를 다루는 창작물이며 사이보그인 소령과 순수한 인간인 우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공각기동대>의 세계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인지. 우리는 정녕 ‘순수한 인간’인지.
미래는 이미 도달했다
내가 어렸을 때, 초등학생 혹은 그 이전까지 나는 부모님의 핸드폰 번호와 집 전화번호를 비롯한 몇 개의 번호를 항상 기억해야 했다. 당시 나에겐 스마트폰은커녕 일반 휴대폰도 없었고 그렇다고 매번 그것들을 수첩에 써서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머릿속에 기억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전화번호는 그 시절 기억한 그 전화번호뿐이다. 휴대폰이 생기고, 또 스마트폰이 생긴 다음에는 그 기계들이 나를 대신해 새로운 번호를 기억해주었으므로.
전화번호뿐일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 미리 그곳에 연락해 가는 길을 세세히 묻지 않는다. 버스가 어디로 가고 나는 어느 지하철역에서 내려야 하는지 스마트폰이 나를 대신해 알아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이 놀라온 기계는 우리가 머릿속에 기억한 바 없는 수많은 정보와 즉석에서 접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우릴 대신해 우리의 취향에 맞는 음악이나 영화 등을 찾아주고 리스트를 작성해 내밀기까지 한다. 그 외에도 우리가 언제 돈을 출금하고 입금했는지, 어떤 물건들을 사고팔았으며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스마트폰은 그 모든 행동을 메모리에 기록한다. 때로는 우리 자신조차 잊어버린 기억까지도 이 기계는 놓치지 않고 담아낸다. 만일 해커들이 그 기록을 해킹한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우리가 한 적 없는 일을 한 것으로 조작할 수 있다. 또한, 누군가가 그러한 데이터를 활용해 자신을 다른 이로 위장하려 한다면 그 역시 이미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그 데이터의 힘은 막강한 것이며, 쓰이기에 따라서는 우릴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한 위력은 스마트폰에 기록되는 그 모든 데이터가 그 자체로 이미 나의 외부-기억이라는 것에서 비롯한다. 그 외부 기억에 담긴 내 인간관계의 흔적, 나의 개인적인 취향, 내가 속해있는 집단의 정체성과 문화는 그 자체로 나라는 인간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며, 부정할 수 없는 나의 ‘고스트’다. 따라서 나는 단언한다 : 우리는 이미 우리 뇌가 수행해야 할 기능의 일부를 스마트폰을 비롯한 여러 기계에 맡기고 있다. 그 시점에 그것들을 이미 내가 통제하는 도구가 아니며 나의 일부로서 작동한다. 즉 우리는 어떤 의미에선 이미 사이보그다. 유기체와 기계의 결합으로서 우리는 존재한다. 현대의 ‘순수한 인간’은 허구이며, 인간성과 인간의 운명 또한 마찬가지다.
죽음과 리부트Reboot의 운명
이것이 섣부른 결론일까? 하지만 나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TV로 다가가 숨 쉬듯 자연스럽게 화면 위로 손가락을 그어 넘기려는 모습에서 정확히 같은 것을 읽어낸다. 자신의 실제 얼굴 대신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입체 이미지를 얼굴로 활용해 타인과 관계 맺는 버츄얼 유튜버Virtuber의 모습에서, 사람의 말과 행동을 허위로 구현해낼 수 있는 딥페이크 기술에서, 인간을 속여 넘길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게 된 인공지능의 발달에서 같은 것을 읽어낸다. 근대 이후 흔들린 바 없이 믿어져 왔던 인간의 운명 –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세계를 스스로의 선택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인간, 홀로 오롯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인간의 상은 사실 얼마나 불안정한가. 그 백척간두 같은 길을 고집하며 나아갔을 때 그 끝에 인간이 이를 장소는 어디가 될 것인가.
안타깝게도 이러한 위기 – 우리의 일상과 신체가 이미 놀랄 정도로 밀접하게 기계들과 결합하여 있고, 우리의 존재가 이미 순수성을 잃은 융합체로서 존재하며, 그 사실이 우리의 정체성을 위기에 처하게 할 수도 있음을 뒤늦게 인지했다 해서 지금부터 그것을 벗어날 수는 없다. 가령 당장 내일부터 스마트폰을 일체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가능할까? 내가 느끼는 일상의 불편함은 차치하고 그 즉시 주변 사람들로부터 왜 연락이 되지 않느냐는 불만이 빗발칠 것이다. 시스템은 당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모두 스마트폰으로 전송한 다음 당신이 스마트폰을 쓰지 않기로 했기에 그것들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하면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한 역반응들 외에 그 실천이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모두가 사이보그인 시대, 융합의 네트워크에 소속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시대에 그와 같은 순수성으로의 회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차단’, 네트워크로부터의 고립과 도태를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립은 이미 하나의 반동 행위에 지나지 않으며, 해킹과 딥페이크를 아우르는 다양한 위험 앞에 얼마든지 조작될 수도 폐기될 수도 있는 나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데 어떤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유사-인간들은 당신에게, 아니 인간에게 죽음을 속삭인다. 하지만 그 죽음은 종결, 소멸의 의미에서의 죽음이 아니라, 지난 수 세기 동안 변함없이 굳건했던 인간 형상의 죽음이다. 다시 말해 자신과 세계의 운명을 홀로 거머쥔 순수한 인간의 죽음이자 사이보그로서의 – 네트워크적 잡종으로서의 리부트이다. 그들은 말한다 : 스스로 사이보그임을 받아들여라. 이미 잃어버린 인간의 순수성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사이보그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라. 당신이 융합체로서 다른 유사-인간들과 공존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 공존에서 어떤 가능성을 새로이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생각하라.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하라.
우리는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마도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므로. 휴머니즘의 시대는 이미 저물어간다. 그렇게 인간은 이미 인간의 운명이 아닌 사이보그로서의 새로운 운명을 고민해야 하는 시대에 도착해 있다.
* 이 에세이는 일민미술관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국고 보조금을 지원받아 수행한 ‘2021년 사립박물관 미술관 온라인콘텐츠 제작지원 사업’의 결과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