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와 모기장〉(2026)
신문 게시판이 여러 정보와 이미지를 나란히 싣는 방식에 주목한 곽이브의 신작은 비트린을 ‘그린 그림’과 ‘수집한 그림’이 함께 놓인 그림 게시판으로 사용한다. 디지털 시계, 건물 외벽을 프로타주한 이미지, 미술관의 건축 양식을 참고해 드로잉한 르네상스식 문은 작가가 비트린 주변을 관찰하며 직접 만든 이미지이다. 반면 해바라기 그림, 서울의 랜드마크 도안을 색칠한 그림은 그가 어머니의 재활을 위해 미술을 가르치며 모은 것으로 사적 기억에서 비롯된 수집품이라 할 수 있다. 창작으로서의 그리기와 재활·취미로서의 그리기를 한데 놓은 이 작업은 일민미술관 1전시실에 전시 중인 동명의 작업에 대한 거울상이다.
작품의 첫 번째 레이어는 건물 외벽 타일과 화강석 표면을 초배지에 먹으로 프로타주한 이미지이다. 입체적인 건축물의 외피가 얇은 종이 위의 흔적과 무늬로 옮겨졌다가 다시 건물의 외벽을 이룬다. 그 위에는 두 번째 레이어인 르네상스식 문 그림이 걸린다. 이 그림은 과거의 문을 정확히 재현하는 대신 기능을 잃은 출입구를 ‘문’으로 식별하도록 하는 도식적 이미지를 제시한다. 일민미술관 건물은 균형과 비례, 규칙과 조화를 중시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건립 당시 신문사라는 용도를 수용하면서 양식적 원칙에서 벗어난 요소가 더해졌고, 여러 차례 증축을 거치며 출입문이 중심축을 벗어난 비대칭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작가는 이 비대칭에 착안해 크기와 비율이 미묘하게 다른 두 개의 문 그림을 비트린과 1전시실에 각각 배치했다. 이는 건물의 표면과 기능, 닮은 듯 어긋난 구조의 특성을 회화적 장면으로 번역한 결과이다.
세 번째 레이어인 ‘수집한 그림’ 속 해바라기는 장식과 기복, 좋은 기분을 불러오는 도상으로 반복해 소비되어 왔다. 색칠 공부용으로 인쇄된 서울의 랜드마크 역시 규격화된 도안으로서 표준성을 띤다. 사라진 문을 양식의 개연성에 기대어 그린 앞선 회화처럼 이들 역시 외형을 본떠 되풀이할 수 있도록 만든 도식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통속성은 표준화된 도상으로 끝없이 복제되는 태극기, 정해진 동선을 따라 랜드마크를 오가는 관광객이 빚는 광화문 풍경과도 닮았다. 비트린의 바닥에는 디지털 시계를 인쇄한 종이 더미가 놓인다. 작가는 건축물에 누적된 시간을 복기하면서 오히려 ‘지금’을 환기하는 장치로 이를 사용하는데, 이처럼 시대와 장소, 문화적 맥락에 따라 의미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곽이브의 이미지는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오가며 고정되지 않은 상태를 지향한다.
작품 제목 〈태극기와 모기장〉은 국가적 상징물과 일상용품인 두 단어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위계가 다른 정보와 이미지를 병치하는 게시판의 구성 원리를 따른다. 태극기와 모기장 모두 일종의 보호장치에 관한 은유라는 점에서, 이 은유는 광화문을 이루는 다층적인 의미에 작가의 사적 기억을 포개어 놓는 작품의 구조를 압축한다.
곽이브(b. 1983)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의 도심 건축물과 주거 공간의 형태에 따른 조형성·미학성을 탐구한다. 평면과 입체를 오가는 반복과 재배치를 통해 공간의 원근, 크기, 부피, 시간에 관한 감각을 재조정하며, 삶을 지속하기 위한 행위와 미술의 조형적 실천이 교차하는 지점을 살핀다.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2020), 인천문화재단 인천아트플랫폼(2017),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2016)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이사24》(2024, Hall1), 《흰머리》(2017, 공간형), 《면대면 시공-건축 프로젝트: 역할》(2015, 취미가)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하이트컬렉션(2026), 대전시립미술관(2025), 인천아트플랫폼(2025), 부산현대미술관(2022) 등에서 단체전에 참여했다.
비트린
비트린은 일민미술관 건축 100주년(1926)을 맞아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옛 출입구에 가설된 공간입니다. 비트린은 미술관에서 ‘진열장’을 부르는 말로, 이곳에서는 미술관의 수장함이자 임시 통로로 기능합니다.
기간
2026.8.14.(금) ― 11.15.(일)
장소
일민미술관 옥외 비트린
* 별도의 입장권 없이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주최
일민미술관
참여작가
곽이브
기획
신지현
진행
신혜인
그래픽 디자인
슬기와 민
공간 디자인
길종상가
사진
스튜디오 오실로스코프
